[스포츠W 임가을 기자] ‘찬란한 내일로’는 영화도 일상도 위기에 처한 명망 있는 감독 ‘조반니’가 찬란한 내일로 향하기 위한 유쾌한 여정을 그린 시네마틱 인생찬가로, 이탈리아 출신의 거장 난니 모레티 감독의 신작으로 지난해 제76회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됐다.
특히 ‘찬란한 내일로’에는 이탈리아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한국인 피아니스트 유선희가 ‘한국인 통역사’ 역으로 출연해 한국인 최초로 이탈리아 영화 데뷔작을 통해 칸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아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유선희는 주인공 ‘조반니’의 아내 ‘파올라’와 함께 신예 감독의 작품을 제작하고 있는 한국 제작자들의 통역사 역을 맡아 감초 연기를 펼쳤다.
▲ 유선희 [사진=본인 제공] |
‘찬란한 내일로’의 국내 개봉을 앞두고 내한한 유선희는 지난 23일 서울 종로구 소재의 에무시네마에서 스포츠W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유선희는 한국에 방문한 소감으로 “저의 고향 한국에 이탈리아 영화를 알리기 위해 올 수 있어서 정말 기쁘다. 또, 영화에서 제가 맡은 배역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더 좋은 것 같다.”고 전했다.
유선희는 예원학교를 졸업해 14살에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산타 체칠리아 국립 음악원에 수석 입학, 수석 조기 졸업해 현재까지 이탈리아를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다. 음악가로 활약하고 있던 유선희가 연기에 도전하게 된 건 우연한 계기였다.
“3년 전 영화배우를 하는 친구한테서 자기가 있는 에이전시에서 아시아 계통의 배우를 찾는다는 연락이 왔다. 아무래도 제가 뮤지션이다 보니 배우와 예술이라는 접점이 있어서 잘 할 것 같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해보자는 마음으로 에이전시에 들어갔고, 이후 난니 모레티 감독님 작품의 오디션에 참여하겠냐는 제안을 받아서 참여하게 됐다. 사실 배우였다면 감독님 이름 자체에 벌벌 떨었을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다 보니까 아무런 기대감 없이 가서 오디션을 보게 됐다.”
한 분야에 오랫동안 발을 담그고 있던 전문가가 완전히 다른 분야에 도전하는 것은 두려움을 동반하기도 한다. 이에 대한 질문에 유선희는 ‘한 번 해보자’하는 생각으로 오디션에 임했다고 말했다.
“클래식 음악을 했지만 호기심이 많았고, 어릴 때부터 락, 팝, 일렉트로닉 등 구분 없이 여러 장르의 음악을 많이 들어왔다. 그래서 다른 장르의 음악을 하는 분들과 컬래버하는 좋은 기회들이 많이 생겼고, 그 때마다 주저하지 않고 시도해봤다. 영화 제안이 왔을 때도 굳이 제 나이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컬래버의 연장선이라는 생각으로 한번 시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 유선희 [사진=본인 제공] |
또, 유선희는 음악과 연기는 도구가 다를 뿐, 모두 표현의 예술이기 때문에 그간 해 온 음악이 연기에도 많은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음악의 경우에는 작곡가가 원하는 악보, 해석을 기반으로 악기를 통해 표현을 하고, 영화의 경우는 대본을 기반으로 요구하는 심리적 요소나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목소리, 표정, 몸짓으로 악기보다는 직설적으로 표현하게 된다. 그래서 처음 세트장에서 연기하게 됐을 때 감독님께서 지시해 주셨기 때문에 더 쉬운 것도 있었지만, 피아니스트로서 지휘자와 함께 작업할 때 연주에 대해 조율하는 것에 익숙하다보니 생소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최근 유선희는 피아니스트라는 본업과 ‘찬란한 내일로’의 음악을 연계해 공연GV(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기도 했다. 유선희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눠지는 ‘찬란한 내일로’의 음악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극 중 조반니가 부부의 지루한 삶을 찍고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다 집어넣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얘기를 하는데 실제로 ‘찬란한 내일로’에 이탈리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칸초네(이탈리아의 노래)가 등장해 감성을 건드린다.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으로 만든 음악은 프랭크 피어상티라는 작곡가님이 맡았다. 난니 모레티 감독님과 오랫동안 작업하신 분인데 특유의 감성으로 심리적 요소를 섬세하게 잘 살려서 곡을 만드신다. 저도 그 분의 음악을 되게 좋아하고, 그 분의 곡을 최근 판타지아에무에서 연주하기도 했다.”
연주와 연기는 같은 표현의 예술이지만 홀로 음악을 완성할 수 있는 피아노 솔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만큼 많은 사람과 직접적으로 소통하며 결과물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 제작 과정은 겪어보지 못했다. 유선희는 “솔리스트로 활동했기 때문에 연습부터 무대, 일상까지 항상 혼자였다. 그것에 굉장히 익숙했고 즐기는 편이었다. 단체 활동을 경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세트장에 있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하고 작업할 수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며 촬영 과정을 회상했다.
“제게 정말 좋게 다가왔던 건 사람들과 비벼가면서 작업하는 경험이었다. 관객들은 스크린으로 배우들이 연기하는 모습만 보지만 그 뒤에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없으면 영화를 이루는 하나의 씬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씬,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다같이 노력하고 협력하는 공동체 작업이 필요한데, 그게 저는 너무나 즐거웠다. 그동안 혼자서 일을 하는 것에 익숙해져서 그게 혼자인게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작업도 정말 좋다고 느껴서 이번 기회에 배운 점이 굉장히 많았다.”
▲ (왼쪽부터) 난니 모레티, 유선희 [사진=본인 제공] |
오디션을 보고 일주일이 지난 후 매니저를 통해 난니 모레티 감독이 마음에 들어한다고 전해들었지만, 한 달이 지나도 연락이 없어 탈락한 줄 알았던 유선희는 나중에 감독이 자신을 선택했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말했다.
“캐스팅 된 후에는 감독님과 면담을 꽤 많이 했다. 제가 피아니스트라는 것에 대해서도 궁금해하셨고, 왜 이탈리아에서 살게 됐는지와 같은 저의 백그라운드에 관련한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감독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떤 걸 원하셔서 저를 캐스팅하셨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스스로 생각하는 캐스팅의 이유에 대해 묻자 유선희는 영화에서 맡은 배역과의 연결점을 꼽았다.
“제 생각에는 감독님께서 보셨을 때 제가 한국과 이탈리아의 문화를 쉽게 넘나들 수 있는데 제가 맡은 역할인 통역사는 두 나라의 언어만 번역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두 문화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지 않나. 그런 부분에서 감독님께서 결정을 하신 게 아닐까 싶다.”
난니 모레티는 이번 영화에 연출로서 참여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플레이어인 주연 배우로도 참여했다. 유선희는 현장에서 배우로서 마주한 난니 모레티에 대해 말하기도 했다.
“감독님께서는 항상 자신의 이야기를 하신다. 그래서 연출을 하시면서도 주인공 역할을 같이 맡으시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사실 이탈리아 내에서도 감독님의 연기에 대해서도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데, 제가 세트장에서 마주한 감독님의 연기는 감독님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느껴졌다. 자기 자신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연기의 대가가 와도 감독님이 원하는 캐릭터와 감독님만이 가진 특유의 감성을 표현할 수 없다. 이런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굉장히 놀라우면서도 즐거웠다.”
▲ 사진=에무필름즈 |
극 중 유선희와 난니 모레티 감독을 비롯한 일원이 다함께 소주잔을 들고 원샷하는 이름바 ‘원샷씬’은 유선희의 아이디어에서 탄생했다.
유선희는 “감독님께서 제게 제가 한국 사람이고 한국 문화를 잘 아니까 최대한 한국적인 방식으로 자유롭게 표현해보라고 지시하셨다. 저는 이 씬이 좀 재미있었으면 했고, 그래서 한국어로 ‘건배’를 외치고 소주를 원샷하는 장면을 만들어냈다.”고 웃어보였다.
“소주잔도 제가 집에서 갖고 온 거다. 제작사 측에서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조그마한 잔으로 건배를 하던데 아무 잔으로 가져가도 되는지, 아님 특정한 게 있는 건지 물어보길래 꼭 한국 사람은 소주잔이어야만 한다고 알려주고 집에 있는 참이슬 소주잔을 가져갔다. 또, 무조건 원샷을 하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한번에 마시는 걸 강조했다. 그래서 촬영하는 동안 원샷을 수없이 반복했던 기억이 있다.”
난니 모레티 감독은 영화 감독이자 각본가, 배우, 제작자, 심지어 극장주까지 겸하는 독특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이는 그가 영화에 가진 무한한 사랑을 짐작케한다. 유선희는 “감독님께서 영화를 만드시는 이유는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 하기 때문이다. 감독님이 영화에 가진 애착을 구체적으로 표현은 안하시지만 현장에 있는 저희들은 그걸 느낄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요즘은 OTT가 많이 발달된 사회이기 때문에 그전처럼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그냥 집에서 편하게 언제 어디서든, 처음부터 끝까지 보지 않아도 있을 만큼 전통적인 방식을 많이 잃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다보니 굉장히 상업적인 콘텐츠들이 많이 생기는 반면 영화관들은 문을 닫고 있다. 그런데 감독님께서 영화를 만드시고 영화의 세계에 뛰어든 이유는 감독님께서 영화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자신이 영화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 뿐인거다. 감독님께서 예전에 하신 인터뷰에서 ‘단 한 명의 관객이라도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영화를 만들겠다’고 하셨다. 영화에 대한 어마어마한 사랑의 표현이다.”
어린 시절부터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걸 좋아했다고 말한 유선희는 영화관이 줄 수 있는 경험을 강조했다. 그는 “영화관만이 조성하는 분위기가 있다. 어두운 곳에 큰 스크린이 있고, 영화만 존재할 뿐 다른 건 존재하지 않는다. 집에서 TV를 통해 영화, OTT를 보면 누군가 초인종을 누르고, 전화벨이 울리는 등 우리를 방해하는 요소들이 많다. 반면 영화관은 영화에만 몰입하게 돼서 영화의 세계에만 다녀오게 된다.”고 설명했다.
“방금까지 영화라는 세계에 들어가서 마치 그 안에 인물이 된 것 같은 경험을 했는데 영화관 밖을 나오면 평소와 같은 일상생활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고 쇼킹했다. 별 같은 세계에 다녀왔는데 일상은 지속되고 있는 경험을 느끼는게 좋아서 어렸을 때부터 영화관을 가는 걸 좋아했다.”
▲ 유선희 [사진=본인 제공] |
현대화되는 영화 산업으로 영화관은 위기를 맞고 있는 반면, 트렌드는 아날로그의 부흥을 가져오고 있기도 하다. ‘찬란한 내일로’ 역시 화려하고 자극적인 현대의 영화보다는 편안하고 아늑한 아날로그의 감성과 닮아있다. 최근 다시 관심을 모으고 있는 아날로그에 대해 유선희는 긍정적인 감상을 보였다.
“요즘 같이 풍족한 세상에서는 나올 수 있는 건 이미 다 나왔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새로운 건 있을 수 없고, 그와 동시에 모든 걸 쉽고 빠르게 접할 수 있기 때문에 포화된 상태이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쉽게 식상하게 느끼게 되고, 자연스레 옛 것을 찾게 되는 것 같다. 아날로그만이 주는 감성은 어떤 것도 대체할 수 없기 때문에 아날로그가 부흥하는 건 굉장히 좋은 것이라 생각한다.”
끝으로 유선희는 이번 ‘찬란한 내일로’를 감상하게 될 한국 관객에게 “영화 자체를 그냥 재미있고 유쾌하게 봐주셨으면 좋겠고, 영화 전체의 스토리가 주고 싶어하는 메시지에 집중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영화의 주인공 조반니는 자신의 영화세계뿐만 아니라 사적인 삶에서도 수많은 역경을 겪고, 때문에그의 삶은 엉망진창에 우울합니다. 하지만 그런 조반니의 마음 한 구석에는 오늘은 힘들지만 그래도 내일은 다르지 않을까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목도 ‘찬란한 내일로’ 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영화와 비슷합니다. 맨날 좋을 수도 없고, 맨날 나쁠 수도 없습니다. 관객분들도 내일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오늘은 힘들지만 내일은 더 밝은 날일 거라는 생각으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마음을 지닌 채 감상하셨음 좋겠습니다.
한편, 영화 ‘찬란한 내일로’는 오는 29일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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