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W 임가을 기자] 뮤지컬 ‘브론테’는 여자가 글을 쓰는 것이 허락되지 않던 빅토리아 시대에서 이야기하기를 멈추지 않은 샬럿, 에밀리, 앤 브론테 자매의 삶에 상상을 더해 완성한 작품. 성재현 작·작사, 양지해 작곡, 조민영 연출이 창작진으로 참여했다.
지난 2022년 초연을 올린 작품은 2년 간의 재정비 기간을 거쳐 올해 3월 더 커진 무대 위로 돌아와 6월 2일 시즌의 마지막 공연을 올렸다. 초연에 이어 재연에도 연이어 작품에 참여한 조민영 연출은 폐막을 앞둔 지난 5월 21일 스포츠W와 서울 종로구 소재의 카페에서 ‘브론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사진=네버엔딩플레이 |
창작극임에도 초연부터 흥행을 이끈 작품인 만큼 다시 무대 위로 올리는데에는 큰 부담감이 따라왔다. 조민영 연출은 “부담감이 많이 있었다. ‘브론테’를 2년 만에 올리는 거긴 하지만 창작진들끼리는 틈틈이 연락을 하고 있었고, 수정 대본과 곡들을 주고받으면서 서로 어떤 부분들을 피드백 받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초연을 마치고나서 이 작품을 우리가 원하는 만큼 만들어냈는지 아쉬운 점을 길게 이야기 나눴다. 결론적으로는 초연 때 열심히 만들었으니까 쌓아놨던 걸 아예 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만들었던 걸 어떻게 하면 더 잘 보여줄 수 있을지 고민해서 수정 방안을 잡았다. 재연 첫 공 날, 심장이 터져나가는 기분으로 오프닝을 기다렸다.”
‘브론테’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완성됐다. 조민영 연출은 “창작진 사이가 굉장히 좋았고, 배우 스태프 간의 사이도 좋은 팀이어서 이렇게 분위기가 좋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편안한 분위기에서 작업을 했다.”고 만족감을 나타했다.
“연출로서 모두와 소통하는 게 처음이다보니 초연 때는 의견을 나누면서 서로의 예민한 부분들을 건드리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새 의견을 제시할 때의 규칙들이 생겼다. 우리 서로를 상처 입히지 않는 선에서 솔직하게 말하자, 미리 말하고 나중에 무대 위에서 네 잘못 내 잘못 따지지 말자고 약속했다. 재연 때는 이미 서로에 대해 어느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소통이 어렵지 않았다. 창작진끼리는 ‘도와줘’, ‘살려줘’ 같은 말을 많이했다.(웃음)”
조민영 연출은 어렸을 때 에밀리 브론테가 집필한 소설 ‘폭풍의 언덕’을 처음 읽었을 때부터 흥미를 느꼈다며 “최초로 맛보는 ‘고자극’ 소설에 심장이 쿵쾅쿵쾅거렸고 말 그대로 짜릿하다 생각하면서 읽었다. 또, 저희 어머니께서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다. 어릴 때 잠 못 이루고 단숨에 읽으셨다고 하셨다.”고 회상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서른이 된 것 같은데 브론테 자매들은 서른을 넘기지 못한 시점에 어마무시한 작품들을 써냈다. 어렸을 때 문학으로 읽을 때는 체감하지 못했는데 더 자라고 나서 글을 읽다보니 새삼 대단하다고 느꼈다. 이런 작품을 집필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호기심도 생기고, 놀라운 작품을 써낸 세 작가가 자매라고 하니까 그것도 너무 재미있었다. 또, 아버지가 목사님이었는데 어떻게 그 밑에서 이런 글이 탄생할 수 있었는지, 가난과 어두운 날씨, 사회적 분위기 등 주변 환경이 억압으로 작용할 때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빛을 발하는지에 관한 이야기들이 매력적인 소재라 생각했다.”
▲ 조민영 연출 [사진=네버엔딩플레이] |
‘브론테’의 두번째 시즌은 무대부터 조명, 음악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분이 수정됐다. 초연보다 규모가 큰 극장으로 무대를 옮기자 비주얼 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일었다.
”이전 무대는 작았어서 표현의 한계가 있었는데 이번엔 좀 더 콘셉트를 표현할 수 있게 됐다. 집이 황야에 폭 안겨있는 것처럼 무대 위에 ‘슬로프’ 라고 부르는 뒷 동선의 높이를 올리고 집에서 황야로 향하는 길을 양쪽으로 낼 수 있어서 좋았다. 천장의 큰 구조물은 세 작가의 글처럼 각기 다른 페이지처럼 보이고, 그들이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시공간에 존재했던 수많은 아이디어와 순간들이 파편처럼 달려있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구상했다.”
조민영 연출은 브론테 자매가 각자가 집필한 소설을 선보이는 ‘밤의 낭독회’ 장면에 대해 피드백을 많이 받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특히 초연 당시 모니터링을 위해 뒷 좌석에 앉아 극을 감상했을 때 이 장면에서 많은 관객들이 잠든 것을 목격했다면서 웃음 짓기도 했다.
“다들 고개가 꾸벅거려서 마음이 너무 아팠다.(웃음) 밤의 낭독회는 정말 중요한 장면이다. 반추해보면 세 자매는 결국 자기가 쓴 글대로 삶을 산다. 작가이자 삶의 주인공이 된 사람처럼 인물들이 보였으면 좋겠는데 이 장면에서 자버리면 너무 중요한 파트를 잃어버리는 격이라 고민을 많이했다.”
고민 끝에 조민영 연출은 이번 시즌에서는 낭독회를 그림자 놀이로 표현해 시각적으로 자매들의 이야기를 무대 위로 펼쳐냈다. 조명을 맡은 이주원 디자이너는 이번 작품에서 그림자와 다채로운 색채를 활용해 호평받은 바 있다.
“초연부터 ‘브론테’의 모든 장면은 하나의 거대한 놀이처럼 보였으면 좋겠다는 컨셉이 있었는데, 그림자 놀이 같은 게 아쉽게 잘 표현되지 못했던 것 같아서 이번에는 각 파트 감독님들을 많이 괴롭혀서 새로운 결과물을 부탁드렸다. 조명 감독님은 엄청난 열의를 보이셔서 일찍부터 회의를 시작했다. 극장이라는 공간의 물리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에 원하는 그림을 맞추려면 연습실에서부터 실험이 계속 필요했다. 계산을 정말 많이 해야해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숫자를 이렇게 많이 쓴 게 이 프로덕션이 처음이다. 정말 험난한 시간이었다. 이외에도 제가 하고싶은 장면을 말씀드리면 조명 감독님께서 이런저런 아이디어로 훨씬 아름답게 표현해 주셨다.”
▲ 사진=네버엔딩플레이 |
‘브론테’가 초연에서 재연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는 넘버의 수정을 논의하는 긴 회의가 있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해당 회의 내용을 바탕으로 성재현 작가는 4~5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숙고하며 수정 방향을 잡았다. 그 결과 샬럿의 솔로 넘버인 ‘답장을 기다리며’와 앤의 솔로 넘버 ‘비유 없는 풍경’이 탄생했다.
조민영 연출은 성재현 작가가 초반부에 샬럿의 선택에 대한 정당성과 각 인물들의 천재성을 드러내는 부분을 마련하고 싶어했다고 전했다.
“앞부분에 ‘답장을 기다리며’ 넘버를 추가함으로서 샬럿의 열의와 천재성, 제 앞에 펼쳐진 상황을 소설 속 장면으로 전환해서 생각하며 나아갈 수 있는 추진력을 드러내고자 했고, 이 넘버의 리프라이즈를 ‘이것이 소설이라면’ 앞부분에 넣고 싶다고 작곡가님과 상의하셨다.”
그렇게 추가된 ‘답장을 기다리며’의 리프라이즈는 ‘이것이 소설이라면’과 결합된 구조를 가지게 됐다. 이에 대해 조민영 연출은 “샬럿이라는 인물이 자기가 해 온 선택 때문에 자매들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스스로를 끔찍해하는 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샬럿은 무너지고 난 후 ‘이것이 소설이라면’이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이런 상황에서조차 소설을 떠올리는 스스로에게 끔찍함을 느끼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을 맞이하고 자기 환멸로 종이를 찢어버리다가도 그럼에도 글을 포기할 수 없기에 바닥을 기면서 찢어진 종이조각을 주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장 희망으로 가득해서 뛰어다녔을 때 불렀던 넘버가 모든 걸 잃어버린 후 황야에 홀로 남겨졌을 때 다시 울려퍼지며 대비되는 감각이 좋았다.”
앤의 작가적인 면모를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추가된 넘버 ‘비유 없는 풍경’은 극 중 앤이 가진 특유의 캐릭터성을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부분 중 하나다.
“작가님이 ‘비유 없는 풍경’의 가사를 전달해 주시면서 앤이라는 인물이 ‘브론테’라는 이야기를 삶으로 확장시키는 캐릭터라고 얘기를 해주셨고, 그래서 주변에 있는 것들을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그 시선을 어떻게 그려내는지가 넘버 안에 담겨 있어야한다고 말씀하셨다. 처음 가사를 봤을 때 너무 좋다고 생각했다.”
▲ 사진=네버엔딩플레이 |
음악에 있어서도 확대된 앤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세 자매에게 각각 드럼, 기타, 첼로가 할당된 ‘브론테’는 앤이 맡고 있는 첼로의 선율을 보강했다.
“드럼과 기타 사이의 조율을 담당할 수 있는 첼로와 앤이 닮아있다고 생각해서 초연 때부터 창작진끼리는 앤을 첼로라고 불렀다. 그런데 초연 때는 기타와 드럼에 비해 돋보이지 않아서 ‘솔직히 앤은 빼고 작업한 거 아니야?’ 같은 항변이 있기도 했다(웃음) 그래서 재연 때는 첼로의 선율도 보강 했다.”
드럼, 기타, 첼로로 편성된 ‘브론테’의 일반적이지 않은 밴드 편성 또한 뮤지컬 팬들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이러한 악기 편성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도 조민영 연출을 통해 들어볼 수 있었다.
“악기 편성에 관한 양지해 작곡가님의 말을 빌려오자면, 일단 드럼과 기타가 한 축을 담당했으면 했고, 기타도 처음-중간-끝을 거치며 점진적인 상승을 표현하려면 나일론, 어쿠스틱, 일렉 모두 필요해서 총 3대의 기타를 번갈아가면서 쓴다. 여기서 보통의 밴드 편성이면 베이스를 넣어야하는데 베이스만으로는 커버되지 않는 선율적인 부분이 있다고 하셨다. 그래서 중저음 음역대를 커버할 수 있는 첼로를 쓰게 됐다.”
‘찢겨진 페이지처럼’ 넘버 이후 각각의 악기가 솔로 파트를 주고 받으면서 연주하는 장면은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 장면에 대해 조민영 연출은 “글을 쓰는 에너지가 가장 중요한 장면이라 짧고 강렬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밴드의 전환과 함께 시공간이 전환된다. 긴 시간과 멀리 떨어져있는 공간을 한 곳으로 몰아넣은 장면”이라 소개하며 “밴드에서 솔로를 주고 받는 연주를 트레이드라고 불러서 저희도 ‘트레이드 장면’이라고 부른다.”고 전했다.
이어 “초고에는 트레이드 장면이 지금의 위치에 없었고 다양한 곳에 배치됐다가 지금의 위치에 안착하게 됐다."고 밝힌 조민영 연출은 "이 아이디어는 작곡가님이 저한테 ‘브론테’를 같이 하게 되면 꼭 해보고 싶은 거라고 제안을 해 주셨다. 글쓰기를 하는 행위와 연주를 동일시해서 만들 수 있다면 밴드를 사용하는 이유에 큰 정당성이 생길 것 같다는 얘기를 해주셔서 완벽히 수긍할 수 있었다.”고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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