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여기, 피화당’ 고전소설의 백스테이지에서 만난 세 명의 ‘환향녀’

임가을 기자 / 기사승인 : 2024-03-07 10:0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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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W 임가을 기자] 병자호란이 끝난 17세기 후반의 조선, 전쟁통에 청나라에 끌려갔던 여인들은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그들을 맞는 건 정절을 잃었다며 손가락질하는 가족들 뿐이다. 이들 중 하나인 ‘가은비’와 ‘매화’, ‘계화’는 사람들을 피해 산 속 동굴에 숨어들고, 그 곳을 ‘피화당’이라 이름 붙이고 살아간다.


‘가은비’와 ‘매화’, ‘계화’는 생계를 위해 이야기를 써 익명으로 내다 팔고, 저잣거리에서는 이들이 쓴 사랑 소설이 큰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 한편, 모두가 이름 없는 작가 선생의 소설을 읽는 걸 목격한 선비 ‘후량’은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고자 이름 없는 작가 선생에게 자신의 글을 부탁하기로 결심한다.

 

 

▲ 사진=연합뉴스

 

뮤지컬 ‘여기, 피화당’은 17세기 조선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으로, 병자호란 이후 창작된 것으로 알려진 작자미상의 고전소설 ‘박씨전’에서 모티브를 얻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영웅소설 박씨전의 작가에 대한 상상을 뮤지컬로 그려냈다. 창작진으로는 뮤지컬 ‘라흐 헤스트’, ‘인사이드 윌리엄’, ‘빠리빵집’ 등의 김한솔 작가와 김진희 작곡가가 참여했다.

고전소설 ‘박씨전’은 교과서에서 거의 필수적으로 다뤄질 만큼 잘 알려져있는 작품으로, 박색이라는 이유로 피화당으로 쫓겨나 독수공방한 박씨 부인이 흉한 허물을 벗고 미인이 된 후, 이 무렵 조선을 넘보고 쳐들어온 청나라 군사를 뛰어난 도술로 몰아내는 과정을 그린다.

극의 전개는 박씨전의 평행우주를 보는 것 같은 통일성을 가졌다. 환향녀라 멸시당하며 가족에게서 버림 받아 동굴에 숨어사는 주인공 일행과 박색이라는 이유로 초당으로 쫓겨난 박씨 부인, 그들이 머무르는 안식처가 화를 피하는 집이라는 뜻의 ‘피화당(避禍堂)’이라 불리는 등 다양한 요소가 두 이야기의 연결감을 강화해 익숙한 고전으로부터 오는 친근감을 준다.

 

▲ 사진=연합뉴스

 

모티브를 얻은 소설이 작자 미상이라는 점을 활용해 불특정다수가 갖는 연대의 힘을 말하기도 한다. 각자의 개성을 지닌 주인공 일행을 통해 아내이자 며느리, 딸이자 어머니라는 역할에 갇혀 자기자신으로서 살지 못하는 여성들의 사연을 아우르고, 시대의 한계를 넘는 공감을 말한다.

또, ‘여기, 피화당’은 단순히 박씨전을 공연으로 구현하는 것이 아닌, 극중 주인공 일행이 써내는 소설로 표현해 창작 뮤지컬로서 별개의 이야기를 펴낼 수 있는 자율성을 부여했다. 소설이 창작된 시대적 배경을 통해 상상할 수 있는 가설과, 실제 시료로 증명된 역사적 사실을 가미해 고전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주인공 일행이 써낸 박씨전을 시연하는 장면도 극의 묘미 중 하나다. 탈, 부채 등의 한국적인 소품을 다양하게 이용해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것은 물론, 국악기가 전면에 등장하는 음악과 판소리가 연상되는 창법으로 극의 흐름에 확연한 변화를 주는 배우들의 목소리가 색다른 인상을 더한다.

 

▲ 사진=연합뉴스

전쟁 이후 자결과 이혼을 강요 받았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은 극은 살아남은 이들이 앞으로 걸어나갈 길을 가리키고 있어 마냥 암울한 흐름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야기 속에서라도 웃고 싶었던 이들이 같은 상처를 지닌 서로를 위로하고, 고난을 딛고 일어서는 과정은 우리가 지나쳐온 역사에 대한 씁쓸함과 그럼에도 이겨낸 이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벅찬 희망을 동시에 전한다.

다만, 극의 후반에 힘의 비중이 쏠린 느낌이 있어 주로 잔잔한 넘버와 정적인 무대 연출로 이루어진 초반부는 집중도가 떨어진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한편, 뮤지컬 ‘여기, 피화당’은 정인지, 최수진, 김이후, 조풍래, 조훈, 정다예, 장보람, 백예은, 곽나윤, 이찬렬, 류찬열이 출연하고, 오는 4월 14일까지 대학로 플러스씨어터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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