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W 임가을 기자] “‘폭설’은 자연 속에 담긴 은유같은 것들이 시적으로 표현이 되어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연과 함께하는 시간이 제게는 굉장히 중요했다. 육체적으로는 고됐지만 겨울 바다에 들어가거나 눈밭에서 촬영한 그 시간들이 굉장히 소중했고, 수안이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던 것 같다.”
▲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
2016년 영화 ‘모모’로 데뷔해 활동하고 있는 배우 한해인은 ‘밤의 문이 열린다’, ‘Birth’ 등 독립영화계에서 주로 활약하며 다채로운 모습을 선보여왔다. 장편 영화의 주연으로서는 처음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 받은 그는 ‘폭설’을 통해 새로운 도전을 이어나간다.
‘폭설’은 강릉에 있는 한 예술고등학교 연극영화과에 재학 중인 수안(한해인)과 설이(한소희)의 이야기를 담은 퀴어 영화다. 아역배우 시절부터 인기를 모아온 하이틴 스타 설이와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는 배우 지망생 수안은 겨울 바다를 배경으로 서핑을 즐긴다. 이들은 영화 속에서 우정과 사랑, 꿈과 현실 사이를 오가며 청춘을 그려낸다.
스포츠W는 지난 1일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폭설’의 주연 배우 한해인과 만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다양한 여성 서사 영화가 등장하고, 그에 따라 자연스레 여성 퀴어 영화에 대한 관심도 높아져가고 있는 현 시점에서 한국 여성 퀴어 영화 ‘폭설’과 ‘우리는 천국에 갈 순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는 단번에 전주국제영화제의 화제작으로 손꼽혔다.
‘폭설’의 주연 배우로서 영화제에 초청 받은 한해인은 “많이 떨렸던 것 같다. ‘폭설’은 제가 정말 애정하는 작품이기도 해서 어떻게 봐주실지 너무 궁금하기도 했고, 상영을 하게 됐다는 소식에 너무 기뻤다”며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영화를 선보이게 된 소감을 전했다.
‘폭설’은 2019년에 촬영을 진행한 작품이다. 이후 추가 촬영, 재편집을 거친 2023년에서야 완성되었기 때문에 촬영 시점과 완성 시점 사이에 큰 간극이 남았다. 한해인은 “틈틈이 다른 작품 촬영도 하고 ‘폭설’에 계속 관심을 가지고 감독님과 많은 얘기 나누면서 준비했던 것 같다.”며 작품을 공개하기까지의 과정을 밝혔다.
▲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
또한 ‘폭설’이 어떠한 변화를 거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들어볼 수 있었다. 한해인은 편집 이전과 이후를 비교했을 때 “이야기를 따라가기 보다는 감각적으로 느껴야만 하는 부분들이 더 커졌다고 생각한다”며 말문을 열었다.
“‘폭설’은 꿈과 현실, 그리고 혹은 기억의 경계를 오가는 작품이다. 편집 전에는 그러한 부분이 조금 설명적으로 들어가있었다면 최종본에서는 많은 부분들을 덜어내면서 좀 더 단순하게 편집을 하신 것 같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모르도록. 감상할 때 조금 난해하다 느껴질 수는 있겠지만 현실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세계에 대한 이야기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연출을 맡은 윤수익 감독은 이미 한해인과 작품을 함께한 경험이 있다. 우연의 일치로 해당 단편 영화의 제목 또한 ‘폭설’이다. 그는 “내용은 완전히 다르지만 눈 내리는 풍경 속에 인물들이 담기는 짧은 단편이었다. 그때 한번 같이 작업을 했었고 이번에 다시 작품을 하게 됐다”며 윤수익 감독과의 인연에 대해 설명했다.
‘폭설’에 이어 또 다시 ‘폭설’로 윤수익 감독과 함께하게 된 한해인이 생각하는 윤수익 감독의 영화가 가진 매력은 무엇일까. 그는 윤수익 감독이 추구하는 독특하면서도 저항적인 색깔에 끌렸다고 고백했다.
“감독님이 만드시는 캐릭터들이 유니크한 면들을 가지고 있다고 느꼈다. 그런 부분들이 마음에 끌리기도 했고 영화 자체도 굉장히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자기만의 세계를 좀 구축해 나가시려는 성향이 강하시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같은 동료로서 많이 응원하고 싶고 개인적으로도 좀 더 다양한 작품들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또한 한해인은 윤수익 감독이 항상 주체적인 캐릭터를 원했다고 말했다. 그는 “제가 가지고 있는 어떤 여린 면과 동시에 강함을 가지고 있는 그런 부분들을 수안이라는 캐릭터와 연결지어서 봐주신 것 같다”며 수안 역에 낙점 된 이유를 밝혔다.
▲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
한해인은 ‘폭설’의 시나리오 초고를 받아봤을 때부터 작품과 함께하기로 마음먹었다고 전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설이와 수안이라는 인물에 대한 공감과 서핑만이 가진 특수성이다.
“처음에 시나리오를 봤을 때 연기를 하는 두 여성의 이야기를 그리는데 여성 배우로서 배우 생활을 할 때 겪는 고민이나 갈등 같은 것들이 많이 와 닿았다. 이 두 명의 캐릭터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앞으로 나아간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서핑은 자연과 함께 하면서 그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겨야 되는 스포츠다. 이러한 서핑을 통해 영화 속 수안의 성장을 그리고 있고, 설이와 수안이 서핑을 통해서 다시 바다 안에서 에너지를 주고 받는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와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폭설’의 주인공인 수안은 설이와 우정, 사랑을 나누면서도 한편으로는 갈등을 겪는 인물이다. 한해인은 자신이 연기한 수안을 변화와 성장이라는 키워드로 설명했다.
“수완이라는 인물을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살고 싶어 하는 인물이라는 출발점에서 발전시켜 나갔던 것 같다. 이 영화에서 외모적으로도 변화가 크고, 긴 시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정서적으로도 계속 변화가 있는 인물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인물은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찾는 과정에서 성장해 나가고 몸으로 부딪히면서 알아가는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영화 속 수안은 배우지망생이지만 직접 영화를 찍는다. 이를 연기한 한해인 역시 수안과 마찬가지로 단편 영화 ‘비디오 킬 더 라디오스타’를 연출했다. 그가 감독으로써 영화를 연출 해봤던 경험은 수안과 이어진 연결 고리중 하나로 작용했다.
“수안이라는 캐릭터가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선택을 받아야만 하는 배우라는 직업은 아무래도 그러한 부분에 있어서 조금 수동적일 수 있지 않나. 수안은 그 한계를 넘어서 제 자신의 이야기를 좀 더 적극적으로 펼치고 싶어 하는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런 부분에서 개인적으로도 많이 용기를 얻었고 나도 당장 기회가 없다고해서 배우로서의 삶만을 생각하며 내 자신을 방치하기보다는 좀 더 나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연출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
이어 한해인은 여러 갈등을 겪으며 성장하는 수안을 연기하며 공감을 느끼고 용기를 얻었으며, 자기자신에게 있어서 기억에 남는 인생 캐릭터라 표현하기도 했다.
“여성 배우로서 온전히 내 모습을 다 드러낼 수 없고 조금 나 자신을 포장해야 한다고 느껴야하는 순간들이 조금은 있다. 그 부분에 있어서 항상 자유로워 지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래서 수안이가 겪는 마음에 대해서 많이 공감이 됐었다. 수안이를 깊게 연기하면서 느끼고 나니 나 또한 수안이랑 닮아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수안이를 통해 나를 찾고 싶다, 배우로서의 나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삶을 찾고 싶고 그 모습이 단단해진다면 배우로서, 혹은 그냥 배우가 아닌 삶을 걷게 되더라도 그만큼의 자유로움을 느끼면서 살 수 있겠다고 용기를 얻었던 것 같다.”
한해인의 데뷔작 영화 ‘모모’는 퀴어영화다. 전 여자친구 아름의 고양이를 맡아 주기로 한 소희와 그 상황이 섭섭한 현 여자친구 유진의 이야기를 담았으며 여기서 한해인은 소희 역을 맡아 연기를 펼쳤다. 그는 ‘모모’와 ‘폭설’이 같은 퀴어영화지만 감정선에 있어서는 초점을 맞춘 부분이 달랐다고 설명했다.
“‘모모’는 보통적인 커플로서 느낄 수 있었던 감정선이라고 한다면, ‘폭설’은 우정인지 사랑인지 잘 알지 못한 채 설이의 모습을 완전히 봐주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이 실려 있다. 이런 감정이 그리움으로 번져서 설이라는 존재가 굉장히 수안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아있게 되고 어떻게보면 수안이 설이가 먼저 걸었던 길을 따라 걷게 되는, 그런 이야기에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폭설’에서는 퀴어들의 사랑에 초점을 맞췄다기보다는 서로 친구이자 사랑의 감정을 느꼈던 사람, 잊지 못하고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기억의 존재를 그렸다고 생각한다.”
▲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
수안과 설이의 입체적인 관계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었다. 한해인은 “수안에게 설이는 복합적인 존재”라며 영화 속 두 사람이 지닌 서사에 대해 언급했다.
“학창시절의 수안이는 사랑에 빠졌지만 자신을 방어하고 있고, 아직 자신의 정체성이나 자아가 확립되지 않아서 고민하는 캐릭터였기 때문에 설이라는 존재가 복잡하게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그냥 사랑이라는 감정이 하나가 아니라 친구이면서 동경하는 배우이기도 하고, 팬이기도 하면서 무의식속에 배우로서 느끼는 열등감 또한 있었다고 생각한다.”
극 중 수안이 사랑하는 인물, 설이 역으로는 배우 한소희가 분해 화제가 됐다. 드라마 [부부의 세계], [알고있지만], [마이 네임] 등 굵직한 작품에서 활약한 그는 첫 스크린 데뷔작으로 ‘폭설’을 택했다. 작품에 먼저 합류해 스태프와 함께 회의에 참여하기도 한 한해인은 설이 역을 맡을 배우를 구하기가 매우 힘들었다고 밝혔다.
“아역스타의 삶을 살고, 굉장히 예쁜 외모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자신에게 독이 되어서 아픔이 된 캐릭터였기 때문에 예쁘면서도 가지고 있는 아픔이 보이는 그런 인물을 찾기가 좀 어려웠다. 그러던 중 감독님이 소희 배우님을 보게 됐고, 이분이라면 설이를 표현해 주실 수 있겠다는 믿음이 딱 생기셨나보다. 그래서 감독님이 적극적으로 연락을 드렸고, 다행히 소희 배우님이 흔쾌히 함께 하고 싶다는 의사를 비춰주셨다. 소식 듣고서는 너무 기분 좋았다.”
한해인은 한소희와의 첫 만남을 회상하기도 했다. 그는 “소희 배우님은 미팅 겸 리딩으로 처음 만났었다. 굉장히 털털하시고 친화력도 좋으셨다. 가까이 하기 조금 어려울 거라는 혼자만의 생각이 있었는데 너무 편했다. 같이 잘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
또한 “영화 속에서 눈밭에서 함께 뒹굴고, 뛰어다니면서 서로 장난치는 장면이 있는데 그 장면이 제가 기억으로는 첫 테이크에 바로 오케이가 났었다. 소희 배우하고는 크게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연기를 할 때 서로 잘 맞춰지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며 상대 배우와의 연기 호흡에 대해 전하기도 했다.
아름다운 장면 뒤에는 마땅한 노력이 따른다. 특히 ‘폭설’은 한 겨울에 지방에서 촬영을 했으며, 겨울 바다에 입수해 서핑을 하고 서핑복을 입은 채 눈밭에 구르는 등 촬영의 난이도를 실감케 하는 장면들이 많았다. 한해인은 촬영 현장 분위기에 대해 “다들 웃으면서 ‘아 힘들다!’ 했던 기억이 난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고되긴 했지만 낭만이 있었다. 눈내리는 날에는 눈이 오면 또 기분이 이상해지지 않나. 잊지 못할 경험이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폭설'은 자연 속에 담긴 은유같은 것들이 시적으로 표현이 되어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연과 함께하는 시간이 제게는 굉장히 중요했다. 육체적으로는 고됐지만 겨울 바다에 들어가거나 눈밭에서 촬영한 그 시간들이 굉장히 소중했고, 수안이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던 것 같다.”
배우 한해인은 여전히 도전을 꿈꾸고 있다. 그는 “마이너하다고 할 지라도 내가 성장할 수 있고 연기하며 영혼을 바칠 수 있는 작품에 끌리는 것 같다. 그리고 아직 한국에서 흔하게 나오지 않은, 사회에서 빗겨나있거나 이상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여성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많이 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삶을 살아가는 여성의 이야기.”
마지막으로 한해인은 영화 ‘폭설’을 감상하게 될 관객에게 인사를 전했다.
“‘폭설’은 한 겨울에 대한 영화다. 온통 추운 겨울이라는 계절과 바다 속에 있는 영화라 어떻게 보면 차갑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어떤 시린 계절을 마주하고 난 다음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 순간 성장이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이상하지만 마음 속 여린 부분을 건드릴 수 있는 영화가 되었으면 한다. 보러 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리고 수안이와 설이를 사랑해 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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