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언덕’ 이지은 감독 “당차고 야망 있는, 샤이하지 않은 10대 그리고 싶었다”

임가을 기자 / 기사승인 : 2024-07-12 23: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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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W 임가을 기자]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하고 대놓고 물어보는 시대까지 가고 싶지는 않았다. 얼굴 앞에 대고 바로 묻는 것보다는 자율학습을 시킨 동안 교탁 앞에서 조용히 상담을 하는데 아이들이 귀를 기울이고 있는, 그 긴장감이 더 효과적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지은 감독의 첫 장편 영화 ‘비밀의 언덕’은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은,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민한 5학년 소녀 ‘명은’이 글쓰기 대회에 나가 숨기고 싶었던 진실과 마주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작품의 연출과 각본을 맡은 이지은 감독은 지난 5일 아트나인서 스포츠W와 만남을 가졌다. 
▲ 사진=㈜엣나인필름
 

‘비밀의 언덕’은 제 72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Kplus 경쟁 부문에 초청됐다. 해당 부문은 어린이 영화를 대상으로, 만 11세부터 14세까지의 심사위원 11명이 수정곰상을 선정한다. 영화제 현장에 직접 방문한 감독은 “‘명은’을 아이가 아닌 인간으로 그리고 싶었던 연출 의도처럼, ‘명은’을 단 한번도 아이로 여기는 반응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명은’을 복잡한 내면을 가진 인간으로 받아들이고 이야기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한 관객 분이 영화에 대해 다른 분들에게 애정 있게 설명해 주시면서 ‘명은’에 대해 ‘스윗한데 스트롱하다’고 딱 한 마디를 하셨는데 그 말이 제 기억에 남았다. 함축적으로 이 영화를 얘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독은 ‘비밀의 언덕’ 이전까지는 30분을 넘지 않는 단편 영화만 제작해 왔다. 단편을 만들었을 때와의 차이를 묻자 감독은 의외로 장편 영화와 단편 영화가 그리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고 답했다. 10분짜리 단편 영화도 2시간의 장편 영화처럼 최선을 다해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단편 영화도 장편 영화처럼 빡세게 만들어서 과정은 똑같았던 것 같다.(웃음) 단편 때도 마치 제가 개봉하는 사람처럼 하나하나 세심하게 챙겼고, 작은 영화제에 가서도 긴장하면서 주의를 기울였었다. 제작 방식에는 큰 차이점을 느끼지 못했는데 책임감은 달라졌다. 이전에 만들었던 영화는 길이가 26분, 23분, 10분이었는데 지금은 2시간을 보러 오시는거니까 그 시간만큼의 가치를 느끼게 하면 좋겠다는 책임감과 긴장감이 더 있는 것 같기는 하다.”

 
▲  이지은 감독 (사진=㈜엣나인필름)
 

과거 이지은 감독은 단편 ‘정리’와 ‘산타클로스’를 통해 노인에 관련한 이야기를 풀어낸 이력이 있다. 하지만 이번 장편을 통해서는 10대의 이야기를 전했다. 이에 대해 그는 “다루고 싶은 연령대를 생각하고 영화를 찍은 적은 없다.”며 솔직한 생각을 전했다.

“노인, 아이 문제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 있는 게 아니다. 그냥 인간을 그리고 싶었다. 각자의 연령대에서 체험하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을 위해 작품에 맞춰 선택했을 뿐이다. 그래서 (단편을 연출할)당시에도 질문을 많이 받았었다. 요즘도 아이에 대해 관심이 많냐는 질문을 받고 있어서 없다고 말씀드리고 있다.(웃음)”

영화는 19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초·중·고 시절의 종이 한 장으로 모든 게 정의됐던 가정 환경 조사서라는 소재에서 출발했다. 감독은 “가정 환경 조사서를 통해 우리 사회의 색안경, 편견을 표현하고 싶었다”며 해당 소재를 선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이러한 가정 환경 조사서가 쓰인 90년대다. 그는 “부모님 세대에도 있었지만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하고 대놓고 물어보는 시대까지 가고 싶지는 않았다. 얼굴 앞에 대고 바로 묻는 것보다는 자율학습을 시킨 동안 교탁 앞에서 조용히 상담을 하는데 아이들이 귀를 기울이고 있는, 그 긴장감이 더 효과적일 거라고 생각해서 연출적으로 표현하고 싶었고 쫀쫀한 분위기와 심리를 드러내고 싶어서 90년대를 선택했다.”며 이유를 밝혔다.

 
▲ 이지은 감독 (사진=㈜엣나인필름)
 

또한 감독은 90년대 중에서도 어떤 년도를 선택할지에 대해서도 고민을 많이 했다고 밝혔다. 최종적으로 결정된 년도는 1996년이다.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넘어가는 시점인 1996년은 신구가 교차하는 미묘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국민학교라고 한다면 현재의 학생들이 자신들의 이야기가 아닌 부모님들의 이야기라고 느낄 것 같았다. 그리고 97년부터는 IMF가 터지기 때문에 그 당시의 이야기까지 다루면 복잡한 이야기가 더 들어가야 될 것 같았다. 때문에 딱 하나 남은 선택지인 96년으로 하게 됐다.”

보통의 10대와는 다른 ‘명은’이라는 인물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비범한 성격의 주인공을 탄생시킨 계기에 대해 감독은 “명은이라는 캐릭터는 어떻게 보면 제가 보고 싶었던 인물이었던 것 같다. 당차고 야망이 있으면서 샤이(Shy)하지 않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려 하는 10대를 그리고 싶었는데 조그마한 주인공이 제 머릿 속에 떠올랐다.”고 밝혔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인 만큼, 극 중 ‘명은’의 꾸밈 없는 행보는 웃음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감독의 경험이 포함된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설득력을 부여하려면 리얼함이 뒷받침 되어야 할 것 같았다”며 ‘명은’이라는 인물을 구축한 과정을 설명했다.

“제 습관이나 나도 자칫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가능성들, 경험들이 많이 투영된 것 같다. ‘이명은’과 ‘이지은’에서 ‘명’자만 픽션이다(웃음). 제 경험이 들어가다보니 주의하게 된 것도 있다. 제 경험을 그대로 영화에 가져오면 정말 일기장 같은 느낌이 될 까봐 내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이 감정을 다른 사람들도 느끼는 지에 대해 많이 물어보고 찾았던 것 같다.”

 
▲ 사진=㈜엣나인필름


극 중 ‘명은’을 비롯한 모든 등장인물은 긍정적인 면모만 내보이지 않는다. 질투, 열등감과 같이 우리가 흔히 추하다 일컫는 감정을 사실적으로 그리며 다양한 인물을 미화하지 않고 그대로 카메라 속에 담았다.

“입체적인 인물을 그리고 싶었다. 작품을 연출할 때 모든 인물은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다는 기준을 세워뒀다. 진짜 인간을 그리고 싶었다. 직업이나 연령에 한계를 정해두지 않은 그냥 인간. 결핍을 갖고 있지만 사랑스러운 면을 가지고 있는 양면성을 주연부터 조연, 단역까지 갖고 있게 만들었다.”

‘명은’ 역시 마냥 예쁘고 바른 10대로 보기는 어렵다. 거짓말과 편법으로 도리에 맞지 않는 행동을 이어나가는 ‘명은’의 행보가 관객들에게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우려는 없었냐는 질문에 감독 역시 “여기까지 오면서 많은 유혹에 시달려야 했다”고 답했다.

“명은이가 가진 영악함을 재기발랄하게 꾸미기 위해 음악을 깐다거나, 아이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귀여움을 드러내야 하지 않겠느냐는 유혹에 많이 시달렸지만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저는 인물이 생각하는 머릿속에 이 행동을 해야겠다는 정당성이 있음 그걸 그대로 보여주길 바랬지 포장하고 싶지는 않았다. 첫 장면부터 이런 부분을 의도했던 것 같다. 여과없이 명은이가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고르는 모습을 세세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 사진=㈜엣나인필름


또한 감독은 ‘비밀의 언덕’의 발랄한 포스터를 접하고 영화를 본 관객들은 생각보다 깊은 분위기에 당황하기도 한다며 웃음을 보였다.

“그래서 관객분들의 반응이 더 궁금했다. 지금까지 제가 본 관객분들은 이 영화를 보고 본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느끼시는 것 같다. 과거의 창피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한 모습을 수면 위로 끌어 올려서 통쾌함을 느끼신다. ‘그 감정을 느끼는 게 나만이 아니었어’라는 공감이 다같이 웃는 극장 안에 느껴져서 그런게 아닐까”

사실적인 10대들의 모습을 그린 것에 대해 감독은 과거 초등학교서 예술 강사를 하며 직접 초등학생을 마주했던 경험을 언급했다. 그는 “그 때 미화되지 않은 어린이들의 민낯을 봤던 것 같고, 맑은 눈을 가진 상태에서 시나리오를 쓰게 됐다”며 작품에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비밀의 언덕’의 주연을 맡은 배우 문승아는 영화 ‘흩어진 밤’에서 부모님의 이혼 후 남겨진 아이 역할로 제 19 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문 최연소이자 최초 배우상을 수상했다. 감독은 “‘명은’이 두 시간을 끌어가는 영화이기 때문에 역할에 대해 야심과 욕심을 가진 배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며 작품을 기획할 당시의 캐스팅 기준을 밝혔다.

“제 디렉션을 따르거나 대본을 따르는걸 떠나서 인물을 탐구할 수 있고, 같이 만들어나갈 수 있는 배우. 그리고 극적으로 치닫는 연기말고도 현실적인 연기 속에서 디테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배우였음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 사진=㈜엣나인필름
 

감독이 느낀 문승아의 첫 인상과 오디션 당시의 이야기도 들어볼 수 있었다. 그는 “승아 배우가 처음 오디션장에 들어왔을 때 세련되고 도도한 느낌이었지만 말을 하는 순간 정말 스윗했다. 그런데 연기를 하면 너무 편안하게 해서 시선을 압도했다. 그게 큰 매력이었다. 힘을 주지 않았음에도 힘이 느껴지는. 그런 부분이 신기했기 때문에 이 배우가 너무 궁금하고, 같이 작업을 꼭 하고 싶다는 생각 들어서 캐스팅했다.”며 캐스팅 이유를 전했다.

극 중에는 ‘명은’과 ‘혜진’ 자매가 써내린 글짓기가 자주 등장하고, 글의 저자는 이지은 감독이다. ‘명은’과 ‘혜진’처럼 ‘글짓기 키즈’였다고 밝힌 감독은 “초등학교때 글짓기 대회 나가고, 상을 받기 위해서 온갖 전략을 다 취했던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생동감 있는 글짓기를 만들어내기 위한 과정 또한 존재했다. 감독은 “제가 글을 끝낸 후에 승아 배우와 재희 배우(혜진 역)에게 글을 쓰게 하고 저희끼리 만나서 발표도 했었다. 두 사람의 글을 비교하면서 감성이 어떻게 다르고 이걸 어떻게 제 글과 접합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이 글이 영화 속에 등장해도 충분히 어린 친구들이 썼다고 느낄 수 있겠다고 확신한 이후 사용했던 것 같다.”며 비하인드를 밝혔다.

이처럼 철저한 검증을 거친 이유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으면 영화가 너무 느끼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성인의 관점으로 10대의 글을 쓴다는 것은 굉장히 느끼하고 오글거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경계했다. 특히 자전적 경험이 들어가면 더더욱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과정들을 반드시 거쳤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 사진=㈜엣나인필름


작품의 주 배경이 초등학교고 주인공이 10대이기 때문에 성인 배우와 청소년 배우가 어우러지는 현장에서 촬영이 진행됐다. 감독은 성인 배우와 호흡을 맞출 때와 차이가 있지 않았냐는 질문에는 “성인배우하고 다를게 없었다. 연기를 하고자 하는 프로로 온 배우였기 때문에 정말 똑같았다”며 고개를 저었다.

“다만 어쨌든 저와 스텝들은 어른이고, 이 배우들은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제가 절 스스로 검증하는거다. 내가 말을 잘 하고 있나, 어른답게 하고 있나.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금 성숙한 말을 하고 있는지 언변을 좀 조심하고 있다. 그거 외에는 의외로 없었다. 많이들 물어보더라 힘들지 않았냐고. 인간 대 인간으로 봐서 힘든 게 없는 것 같다.”

앞으로의 이지은 감독이 영화를 통해 그려나가고 싶은 인물은 무엇일까. 영화 속 등장하는 인물에 주목하는 그는 이번 작품과 마찬가지로 ‘미화되지 않은 인간’에 초점을 맞출 예정이다.

“저는 사회적 문제라던가 사상, 철학으로부터 시작하기보다는 어떤 인물에서부터 시작을 한다. 제가 보고 싶은 근사한 인물, 이상한 결핍이 있지만 매력적인 인물을 그리고 싶다. 성별이나 연령대는 상관없다. 베넷 밀러 감독을 굉장히 좋아한다. 감독이 연출한 '머니볼', '폭스캐처'같은 영화는 굉장히 인간을 딥하게 그리고 있다. 이런 영화처럼 살면서 생각이 문득 나는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를 계속 만들고 싶다.”

마지막으로 감독은 스크린을 통해 ‘명은이’를 만나게 될 관객들을 생각하며 바램을 전했다.

“저는 관객분들이 '명은이'라고 이름을 불러주시는 걸 굉장히 좋아한다. 허구의 인물을 진짜 살아있는 인물처럼 '명은이'라고 부르면서 이입을 하시는 게 너무 좋다. 그 때의 명은이들이 지금은 3,40대가 되어서 아이를 낳았거나 혹은 직장을 다니고 있을 텐데 이 영화를 보시고 ‘너만 그때 그런 거 아니었어, 나도 그랬다’ 같은 이야기를 많이 나누면서 위로와 공감도 받고, 그 때 내가 말할 수 있는 언어와 용기가 없어서 데였던 마음을 웃음으로 해소했으면 좋겠다.”

한편 영화 ‘비밀의 언덕’은 극장에서 절찬 상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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