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W 임가을 기자] 인터뷰①에서 이어집니다.
‘홍련’의 핵심은 극 후반부에 등장하는 씻김굿에 있다. 여기서 씻김굿이란 망자(죽은자)가 이승에서 풀지 못했던 맺혀있는 한을 풀어주고 깨끗이 씻겨 극락왕생을 하도록 기원하는 의식이다. 극 중에서는 바리가 홍련에게 이를 행한다.
작품의 서사구조 자체도 씻김굿의 형식을 따랐다. 배시현 작가는 오랫동안 고여있는 상태로 같은 말만 계속 반복하는 홍련이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두고 있기에 이야기 전개가 잘 안됐지만, 작품 전체를 아예 씻김굿이라 생각해 실마리를 찾았다고 전했다.
▲ 사진=마틴엔터테인먼트 |
(배시현) “넋을 부르는 단계, 음악과 춤으로 넋을 달래며 혼백의 말을 듣는 단계, 무조신(바리)이 직접 혼백과 소통하며 한을 풀기 위해 돕는 단계, 그리고 혼백의 한을 씻고 천도의 길로 안내하는 단계로 씻김굿과 동일한 4단계의 형태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절차를 밟는 과정에서 홍련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를 고려해 채워나가다보니, 지금의 구조를 갖춘 컨셉 뮤지컬이 나온 것 같다. 이 자체가 작가로서 큰 도전이었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서사 구조를 버리고 이렇게 만드는 게 맞나 싶어 의문이 들기도 했는데, 음악이 정말 찰떡같이 잘 도와줘서 가능했다. 솔직히 두 번 다시 이렇게는 못 쓸 것 같다.”
음악도 이러한 작품의 특이구조에 맞춰갔다. 박신애 작곡도 이러한 부분이 이번 작품에서 시도한 가장 실험적인 부분이라 말했다.
(박신애) “작품을 만들면서 씻김굿의 형태에 대해서 저도 많이 공부해봤는데, 빙의를 동반한 극적인 장면들을 상상했던 것에 비해 실제로는 굉장히 정적인 모습을 보면서 이걸 어떻게 잘 구현하면서도 새롭게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그러던 중 작가님이 극 전체를 하나의 씻김굿으로 생각하자고 해서, 기승전결을 만들며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모두 가져오게 됐다. ‘홍련이 뭘 좋아할지 모르니까 뭐라도 걸려라’하는 마음이 담긴거다. 그러다 보니 하나의 작품에서 음악들이 잘 섞이지 못하지 않을까 걱정이 많았다. 공연을 올리는 당일까지도 그런 고민이 계속됐었는데, 오히려 다채롭다는 얘기가 많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홍련’은 굿이라는 행위가 포함되어있지만 무속적 요소가 대두되는 작품은 아니다. 이에 대해 배시현 작가는 “민속학적으로 씻김굿이라는 행위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그걸 잘 전달하고 싶었다”고 말하며 듣는다는 행위가 갖는 의미를 다시 한번 강조했다.
(배시현) “굿이라고 하면 살을 날리고 귀신을 퇴치하는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민속학적으로 보면 굿은 죽은 사람의 말을 들으면서 그 사람의 한이 풀릴 때까지 신명 나게 한바탕 놀아주는 행위이고, 이러한 행위를 통해 이승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달래주는 것이었다. 이런 원형을 찾다 보니 굿은 무섭거나 두려운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한을 풀어주는 의미를 담고 있음을 깨달았다. 결국 중요한 건 누군가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어주는 행위였고, 이 행위가 우리나라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전달하고 싶었다.”
▲ 사진=마틴엔터테인먼트 |
굿이 가진 연희적 성격과 제의적 성격을 극에 잘 녹여야 후반부에 등장하는 씻김굿이 뜬금없게 느껴지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는 배시현 작가와 마찬가지로 박신애 작곡도 같은 부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박신애) “마지막 후반부에 나오는 씻김굿을 향해 달려가는 작품이다 보니, 그 씻김굿 넘버를 정말 잘 만들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기존에 있던 민속학적인 씻김굿의 느낌을 잘 담으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섞을 수 있을까 고민했고, 무속적인 행위에 씌워진 선입견들을 지우고 싶기도 했다. 사실 나조차도 그런 선입견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무속의 스테레오타입에서 볼 수 있는 색채감들을 빼는 데 신경을 많이 썼던 것 같다. 공연을 올리고 난 후에 씻김굿 장면을 관객석에서 보는데, 기독교적인 느낌이 들기도 하더라. 누군가를 위해 뜨겁게 기도해 주는 느낌이 들어서, 종교 대통합의 현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웃음)”
뮤지컬은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유기적으로 만들어내는 예술인만큼, 초연을 올리며 함께한 배우들도 ‘홍련’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일조했다. 특히 창작진들은 입을 모아 ‘홍련’의 결말이 지닌 감동에 배우들이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홍련’의 결말은 본래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고, 그중 배시현 작가가 끌렸던 결말은 지금의 결말이 아니었다.
(배시현) “지금처럼 홍련이 씻김을 받고 천도하는 결말 외에 홍련이 바리와 함께 천도정의 신이 되는 결말이 있었다. 바리가 망자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울어주는 위로의 신이라면, 홍련은 망자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분노하며 위로하는 신이 되는거였다. 작가로서 저는 신이 되는 결말이 더 좋았었다. 씻김만 하고 끝난다면 이 이야기가 그저 안타까운 사연을 지닌 개인의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나 하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아마 제가 너무 홍련을 사랑하게 된 탓인 것 같다. 고난을 겪은 아이가 새로운 연대자로 나아가는 결말이 서사적으로 더 완결성을 갖는다고 느꼈었다.”
하지만 막상 초연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배우들과 이야기를 나누자, 또 다른 시각이 더해져 의견차이가 보여지기 시작했다.
(배시현) “배우분들이 피해자가 피해자로서만 존재하면 안 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고, 꼭 홍련이 무언가가 되지 않아도 그저 작고 여린 평범한 아이가 자신의 죄책감을 내려놓기로 한 것만으로도 충분한 용기이자 의미이지 않을까 하는 의견도 나왔다. 또 어떤 결말이 나던간에 홍련이 자신의 마음을 해소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춰야하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도 많이 했다. 이런 의견들을 듣고 공연 직전까지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 지금의 결말을 선택하게 됐다.”
▲ 사진=마틴엔터테인먼트 |
기존 엔딩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지만, 공연이 올라가고 객석에서 무대를 처음 본 배시현 작가는 관객들의 반응을 느끼면서 내가 오히려 시야가 좁았다는 걸 깨달았다고 토로했다.
(배시현) “바리가 던진 ‘너는 무력함이 죄라고 보니?’라는 질문과 홍련이 특별한 무언가가 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게 일맥상통하는 이야기라는 걸 오히려 제가 놓치고 있었다. 홍련이 신이 되는 걸로 막을 내렸다면 이 이야기는 단순히 ‘해피엔딩이라 다행이다’로 끝나버렸을 것 같다. 지금의 엔딩이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진짜 참관인이 되어서 홍련의 이야기에 같이 가슴 아파해주고, 듣는다는 행위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박신애 작곡은 “항상 바뀔 수 있는 열린 마음이 정말 중요한 것 같다”며 “이 뮤지컬 작업에서는 융통성이 굉장히 중요하고, 작업을 하다 보면 그 과정에서 더 극에 맞는 멜로디나 음악이 자연스럽게 나오더라. 그런 점에서 많은 걸 배웠던 것 같다”고 말하며 ‘홍련’ 역으로 활약 중인 홍나현과의 에피소드를 풀어놓기도 했다.
(박신애) “홍련이 천도되는 장면에 음악이 필요했는데, 아름답고 멋진 음악으로 결말을 맺어주고 싶었지만 정말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더라. 그때 홍나현 배우가 제게 다가와서 ‘작곡가님, 맨 마지막에 천도의 길을 갈 때 홍련과 장화가 같이 부르는 노래의 멜로디를 써보면 어떨까요?’라고 제안해주셨다. 그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장면에 맞게끔 멜로디를 살짝 변형했더니 너무 잘 맞았다. 너무 잘 맞았다. 배우분들도 그 음악이 흐르니까 ‘언니, 나 이제 만나러 갈게. 곧 갈 테니까 기다려’라는 마음으로 마무리가 된다고 하더라. 마지막에 정말 좋은 아이디어를 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작품 개발을 시작한 2021년부터 대학로에 정식 공연을 처음 올린 지금까지 ‘홍련’과 함께해 온 창작진은 작품을 보고 관객들이 가장 깊게 공감했으면 하는 것에 대한 각자의 답변을 전했다.
(박신애) “곡을 작업할 때는 몰랐는데, 함께 작품을 만들어가면서 정말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이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우며, 감동적인 일인지 깨닫게 됐다. 그만큼 진심으로 들어주는 것이 정말 어렵지 않나. 그래서 평소에 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도 잘 들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 수십 번 그런 생각을 했지만, 막상 집에 가면 또 잘 안 되더라. 그래서 내가 신은 아닌가 보다. (웃음) 작품을 통해 들어주는 것의 숭고함에 대해 개인적으로도 많이 생각해보게 된 것 같다.”
▲ 사진=마틴엔터테인먼트 |
(배시현) “아동학대 피해자들 중에 상당수가 자기 혐오를 안게 되는 경우가 많더라. 내가 가장 사랑받고 싶은 사람에게 부정당했을 때 많은 이들이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으면서 자기를 부정하게 되고, 단순히 나를 싫어하는 것뿐만 아니라 부모님을 놓지 못하는 자기자신을 더 큰 스트레스로 여기게 된다. 내가 나를 공격하는 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지 않나. 때로는 나에게 원인을 두는 것이 가장 도덕적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그래서 자신을 탓하게 되는 과정도 자연스러운 거라고 생각한다. 조심스럽지만 그건 절대 당신의 탓이 아니라는 말을 홍련과 바리를 통해 전하고 싶었다. 어떤 트라우마가 있든 더 이상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고, 스스로를 다독여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싶다.”
끝으로 배시현 작가와 박신애 작곡은 ‘홍련’을 만나게 될 관객들에게 인사를 전했다.
(배시현) “누군가의 말을 온전히 듣는다는 건 참 어렵고 귀한 능력이잖아요. 그래서 부디 참관인으로 오셔서 홍련을 위해 그 귀한 능력을 나눠주셨으면 하고, 이후에는 참관인 분들이 이 세상에 있는 또 다른 홍련의 바리가 되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박신애) “제가 ‘홍련’을 처음 쓸 당시 임신했을 때라 ‘홍련’의 음악들로 태교를 했어요. (웃음) 배시현 작가님과 4년 동안 치열하게 고민했고, 그렇게 만든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데 전 저희 작품이 보고 나오면 굉장히 큰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우리 모두 각자의 한이 있잖아요. 그 한을 풀고 가실 수 있는 좋고 재미있는 공연으로 만들었으니까요. 꼭 오셔서 즐겁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한편 ‘홍련’은 한재아, 김이후, 홍나현, 이아름솔, 김경민, 이지연 등이 출연하고 오는 20일까지 대학로 자유극장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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