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W 노이슬 기자] 최근 드라마를 보면서 이렇게까지 집중한 적이 있을까. 소리만으로도 전개를 이해할 수 있었던 기존 작품과는 달리 자막을 봐야만 드라마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 있었다. 정우성, 신현빈이 주연을 맡은 정통 멜로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다. '사랑한다고 말해줘'는 예고편에 등장한 잠시 집중해 주세요"라는 내레이션처럼 귀는 물론 눈으로 집중해서 봐야했다. 덕분에 그 어떤 작품보다 사소한 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수 있던 새로운 경험이었다.
지난 16일 종영한 ENA 월화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연출 김윤진, 극본 김민정, 기획 KT스튜디오지니, 제작 스튜디오앤뉴·아티스트스튜디오, 원작 일본 TV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각본 키타카와 에리코·제작 TBS 텔레비전))는 손으로 말하는 화가 차진우와 마음으로 듣는 배우 정모은의 소리 없는 사랑을 다룬 클래식 멜로로, 차진우(정우성)와 정모은(신현빈)이 모은이 작품을 올린 극장에서 다시 재회하며 해피엔딩을 맞았다.
▲ENA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 스틸/스튜디오 지니·스튜디오앤뉴 |
앞서 첫회 엔딩에서 모은이 수어를 배워 자신을 소개하며 진우의 세상으로 들어간 것처럼, 최종회 엔딩에서는 극장을 찾은 진우가 모은에 수어로 자신을 소개한 후 다시 만나서 반갑다고 인사했다. 그리고 마침내 "사랑해, 모은"이라는 진우의 내레이션으로 아름답게 마무리가 됐다.
'사랑한다고 말해줘'는 정우성이 제작 겸 출연한 작품이다. 원작과의 인연은 무려 13년 전이다. 종영을 앞두고 서울 종로 모 카페에서 만난 정우성은 "원작에서 주인공 내레이션이 2부 엔딩에 나오는데 그 소리가 제 가슴에 와 닿았다. 찔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했다. "그때 한창 인터넷이 활성화되고 배우들에게 수식어들이 형용할 수 없는 좋은 수식이 난무하던 때다. 세상에 이렇게 소리가 많은데 소리들에 대한 고민을 할때 쯤이다. 그러다가 사고를 깊이, 천천히 하고 좀 곱씹을 수 있는 이 드라마를 만들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사랑한다고 말해줘'는 정서적으로 차분하고 기존에 보기 드문 정통멜로의 서사를 지녔다. 섬세한 연출은 따뜻하면서도 매번 잔잔한 여운을 남겼다. 곱씹고 또 곱씹어 보게 되는 작품이었다. 도파민이 폭발하고, 자극적인 소재들이 난무하는 최근의 트렌드와는 상반되는 장르다. 또한 '사랑한다고 말해줘'에 앞서 국내 최초 코다(CODA) 드라마 '반짝이는 워터멜론'이 글로벌 OTT를 통해 방영되며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성향은 다르지만 청각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만큼 '사랑한다고 말해줘'에도 영향을 끼쳤다. 정우성은 다양성이 존중받는 시대에 드라마를 선보일 수 있어서 좋았다.
▲ENA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 스틸/스튜디오 지니·스튜디오앤뉴 |
"그때 당시 제작을 하겠다고 하고 방송국과 미팅을 했다. 근데 방송국에서 요청하는 게 주인공이 소리 없이 연기하는게 16부까지 가면 사람들이 안 본다는 것이다. 3부쯤에서 목소리가 트여야 한다고 역 제안이 왔다. 드라마의 주제를 버리고 정우성이 멜로를 한다니까 그것만 오케이하면 싹 바뀌어서 뻔한 멜로가 될 뻔했다. 그때는 아직은 안되는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때도 물론 여기저기 많이 두드렸다. 그렇게 몇 년을 또 준비했다. '반짝이는 워터멜론'을 다 보지는 못했지만, 들어서 알고 있다. 사실 생각지도 못하고 오래 준비한 작품이다. 지금 시대가 다양한 환경에 살고 있는 대상에 관심이 있다는 반증인 것 같았다. 오히려 다행스러웠다."
'사랑한다고 말해줘'는 농인 역할의 주연 배우 정우성을 비롯한 많은 농인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들의 소리가 없기 때문에 더욱 화면에, 그들의 손짓과 눈빛, 표정에 집중하게 했다. 정우성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만들어낸 드라마의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육성 언어 연기를 안하니까 '집중하세요'라는 내레이션과 문구를 예고편에 넣은 것이다. 근데 이렇게 집중을 요구하게 될 줄은 몰랐다"고 했다.
차진우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등장하는 등 그의 과거 서사가 등장하지만, 정우성이 집중한 것은 차진우의 삶 보다는 세상과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할 때의 마음가짐이다. "차진우는 지나간 감정도 놓지 않는 사람이다. 아팠다고 버리지 않는다. 갖고 있다고 해서 연연하려고 하지 않는다. 간직하려는 사람 같았다. 다 쥘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뭘 하나 쥘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순간순간 앞에 오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ENA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 스틸/스튜디오 지니·스튜디오앤뉴 |
'사랑한다고 말해줘'에는 수어를 하는 모습들도 다양하다. 수어는 우리말과 어순이 다르다. 청각장애인 화가인 차진우를 연기한 정우성은 통용적으로 쓰는 수어를 배웠다. "소리에 반응하는 것을 배제하는 것이 가장 첫번째 허들이었다. 수어는 당연히 제가 가져가야하는 언어다. 저는 수어만 구사하고 표정도 많이 쓴다. 진우의 표정은 절제해야 한다고 계산했다. 반면 기현(허준석)이나 서경(김지현)같이 말하면서 수어하는게 정말 어려운 연기였다. 어순도 다르다. 사실은 그들이 더 큰 고생을 한 연기였다. 저는 글로 작성된 대사를 수어로 바꾸고 표현법에 맞게끔 바꾸거나 삭제하고 외우면서 연기했다."
농인 역할이어도 시청자들에 내레이션으로 육성 연기를 고민해본 적도 있지만 심각하게 논의된 사항은 아니었다. 최근에는 국내 드라마도 자막으로 상황을 인지하는 문화가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육성보다는 주변의 생활 소리에 집중했다. "우리 드라마는 침묵 속에 있는, 고요 안에 있는 차진우라는 인물을 다루지만 정적이 흐를 때에 작은 소리의 크기는 정말 세심하다. 이 드라마의 모든 소리는 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제가 드라마볼 때 버스 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리거나 할 때 그 주변 화단에서 울고 있는 풀벌레 소리나 나무가 바람에 스치는 소리 등이 담기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우리 드라마가 그래야한다고 생각했다."
마음의 소리를 내레이션이 대신했기에 더욱 신경을 썼다. "우선 내레이션 할 때 차진우의 감정을 빼려고 노력했다. 최대한 담담하게. 이미 내용 자체, 글이 풍성하다. 차진우의 느낌을 빼려고 했다. 입장 차이를 계속 보여주려 하고, 입장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태도의 드라마다. 누군가에는 네잎클로버는 누군가에는 행운이지만, 누군가에는 안쓰러워보일 수 있는 전혀 다른 시선, 입장이 공존한다. 서로를 인지 안하고 빠르게 가려는 세상에 대한, 메시지를 주고자 했다."
▲ENA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 스틸/스튜디오 지니·스튜디오앤뉴 |
내레이션을 제외한 정우성의 목소리는 극 중 딱 한번 나온다. 술에 취해 헤어진 모은의 환영을 보고 이름을 부르는 모습은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정우성의 애드리브로 탄생된 장면이다. "원작에서도 이름을 부르는 장면이 있다. 원작과는 다른 상황의 극으로 흘러간다. 작가님도 살리고 싶어했는데 연기하는 입장에서는 타이밍을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씬 리허설 하는데 지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모은아'라고 이름을 부르니까 연출도 놀랐다. 동시녹음 기사님도 진우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것이다. 저는 그 타이밍이 맞다고 생각해서 저 혼자 했다. 연출가도 그 지점이 맞는 것 같다고 말하더라."
'사랑해, 모은'이라는 내레이션으로 드라마를 맺은 것 또한 정우성의 제안이다. "진우의 목소리로 끝나길 원했다. 그렇다면 그건 모은을 위한 한마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리를 듣는 나의 입장에서의 다름이다. 그 소리가 진성으로 내는 목소리가 아닐지언정, 모은에게 들리는 마음의 목소리를 시청자가 같이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서 제안했다. 다들 동의하고 좋아해주시는 것 같다."
진우와 모은은 사귀기 시작한 후 함께 있을 때는 항상 손을 잡았다. 태호(한현준)는 진우의 수업을 듣기 위해 청각장애인 친구들 틈에 껴서 되려 피해를 주는 입장이 된다. 들리지 않는 진우는 주변 사람들에게 오해를 사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이런 장면들이 '사랑한다고 말해줘'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다. "세상은 규정짓기 바쁘다. 이분법적 사고로 선택을 강요하는 시대다. 그러다보면 온전한 개인의 사유는 사라지는 것 같다. 시간도 없어 좇기게 된다. 우리 드라마는 그럴 필요 없다는 것을 담고 있다. 진우와 모은이 손을 잡는 것은 더 깊은 교감의 의미다. 손으로 대화를 하는 두 사람에게는 그 어떤 교감보다 깊은 의미다. 진우가 오해에 둘러싸이지만, 사실 진우를 은유적으로 비유한 것이다. 우리가 소통을 자유롭게 잘 한다고 하지만 그 사이에서도 오해가 많다. 같은 음성언어를 쓰는 우리 간에도 말도 안되는 오해들이 있다. 인간과 인간의 소통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 의식을 담은 것이다."
▲ENA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 스틸/스튜디오 지니·스튜디오앤뉴 |
정우성은 '사랑한다고 말해줘'를 소비가 아닌 소유하고 싶었다. 그렇기 때문에 때를 기다렸고, 13년만에 세상 밖에 내놓게 됐다. 함께 호흡한 신현빈은 그 뜻을 알아봐준 든든한 존재였다. "신현빈 아니면 이 드라마는 어떻게 완성됐지? 싶을 정도로 믿음직하고 신뢰가 가는 동료였다. 대본 처음 받았을 때도 소통에 관한 이야기라고 바로 이해해서 깜짝 놀랐다. 굉장히 함께 하면서 든든했다. 딴 생각하지 않는 동료가 옆에 있을 때, 불확실한 결과를 향해갈 때 불안함이 사라진다. 이 드라마의 바람과 지향점을 같이 바라보고 든든하게 온 멋진 동료였다. 신현빈 만세(미소)."
마지막으로 정우성은 "우리 사회가 타인에게 갖는 관심이 바람직한가. 사람의 모든 인생의 서사는 사연이라는게 있다. 응축할 수도 없고, 규정지을 수도 없다. 자꾸 규정지으려고 하는 사회가 돼 가고 있다. 그러면서 선입견이 생기고 편협해진다. 타인에 대한 관심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가냐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고 드라마의 주제를 강조했다.
인터뷰②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