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W 노이슬 기자] (해당 인터뷰는 영화의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시면 읽지 않는 것을 권고드립니다.)
이해영 감독은 2006년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로 데뷔, 신인 감독상을 수상, 백상예술대상에서 영화 시나리오상까지 거머쥐며 유망주로 떠올랐다. 이어 2010년 '페스티발', 2015년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에 거쳐 2018년 영화 '독전'의 각본과 연출을 맡아 다시 한번 흥행에 성공했다. 그는 5년만에 '유령'으로 독보적인 미쟝센을 그려내며 스타일리시한 스파이 액션물을 탄생시켰다.
지난 18일 개봉한 '유령'(감독 이해영)은 1933년 경성, 항일조직의 스파이 '유령'으로 의심받고 외딴 호텔에 갇힌 5명의 용의자가 서로를 향한 의심과 경계를 뚫고 무사히 탈출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를 담은 첩보 액션 영화로, 중국 소설가 마이자의 소설 '풍성'(風聲)을 차용, 실제 1930년대 활동했던 흑색공포단을 모티브로 했다.
▲영화 '유령' 이해영 감독/CJ ENM |
개봉에 앞서 스포츠W와 인터뷰를 가진 이해영 감독은 "원작 소설을 베이스로 하지만 리메이크는 아니다"고 했다. "추리극이고 유령의 정체가 중요하다. 일제 강점기에 인생을 다 받쳐서 삶을 살았던 시대는 그 때가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작과 시대가 유사하지만 우리의 이야기로 바꾸면서 역사속에서 작은 힌트와 뿌리를 찾으려고 했다. 흑색공포단이라는 집단을 베이스로 뒀다. 그들의 활약이, 의거가 되게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말로 찬란했다. 상해애 있던 6.3정 의거를 끝으로 역사에서 사라졌다. 경성에서 누군가가 바통을 이어받아서 한다고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했다."
'유령'은 중반 이후에 장르 변주가 특징이다. 극 초반부터 중반까지 유령을 색출해내기 위해 카이토(박해수)가 5명을 호텔로 끌고 온다. 호텔이라는 한정적인 장소에서 유령을 색출해내는 과정은 마치 캐릭터 무비를 보는 듯한 재미를 안긴다. 반면 중반 이후부터는 한정적인 공간에서 벗어나 활약하는 캐릭터들의 역동적인 모습이 박진감 넘친다. "원작 소설은 밀실 추리극이다. 추리는 저한테 동기화가 되지 않았다.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서 시작하고 싶었다. 그래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캐릭터들이 상황을 겪으면서 궁금하게 만들다가 시원하게 돌진하기 시작할 때 함께 탑승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유령'은 여성 캐릭터들의 활약을 조명한다. 극의 시작은 배우 이솜이 난영으로 분해 강렬한 존재감을 각인 시킨다. 앞서 제작보고회 당시 이 감독은 '유령'의 시작이 이하늬라고 밝힌 바. 이하늬가 분한 박차경은 '유령'에서 독보적인 활약을 선보인다. "박차경을 따라가면서 구성하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박차경을 놓고 가다보니 그가 한명의 동지를 잃고, 또 다른 동지를 얻고, 끝내 대의를 성공시키고 작전을 성공시키는 이야기다. 그래서 중반 이후를 선명함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한정된 장소와 상황을 깨부수도 찢어버리고 폭주하는데까지 도달하는 것이 중요했다. 복잡한 플롯이나 얽힘이나 이런 것들이 최소화되고, 주인공 위주의 이야기가 되게 만들었다."
주인공인 박차경은 캐릭터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인물이다. 그는 어떤 계기로 인해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다. 하지만 계기에 대한 해석은 오픈돼 있다. "차경은 안온한 채로 살아도 될만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움직일 수 밖에 없는 동기가 필요하다. 어떤 결핍과 사랑,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하늬 배우에게는 우리가 쉽게 짐작 가능한 규모의 사랑이 아니었으면 한다고 했다. 좀 더 크고 레이어가 있는, 인생을 송두리째 흔드는 감정이면 했다. 영화 공개 전에 일반 대상들에 모니터링 했는데 다양하게 받아들이더라. 다양하게 해석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 저는 사랑이라는 이름 또한 찬란한 감정과 늬앙스 안에 담겨서 전체를 뜨겁게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영화 '유령' 스틸/CJ ENM |
오프닝부터 차경은 동지 난영을 잃는다. 차경과 난영의 사이는 단순한 단어로만 설명이 되지 않는 감정이 있다. 이솜은 특별출연임에도 스파이의 숙명을 그려내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해영 감독은 이솜의 특별출연 비화도 전했다. "난영 캐릭터가 비중은 크지 않지만 상당히 영향력이 있고 존재감을 끼친다. 단순히 연기로만 커버될 수 없는 존재감과 묵직함이 필요했다. 이솜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강단있는 얼굴도 좋았다. 이하늬와 조화도 재밌을 것 같았다. 워낙 연기도 잘하는데다 열심히 한다고 해서 부탁했다. 이솜 배우 촬영할 때 제가 매번 '너 어떡하지?' 하면서 찍었다. '넌 어떻게 이러니?' 라는 말을 계속해서 나중에는 불편했을 것이다. 극찬을 너무 쏟아서 질척댄다고도 생각했을 수도 있다(웃음). 그만큼 잘했다. 담대한 구석이 있고, 사소한 것에 흔들리지 않는다. 원하는 것을 100가지를 말하면 그걸 완벽하게 소화해낸다. 담대하게 잘 해줘서 이 친구 진짜 멋지다 생각했다. 되게 형같다 생각했다."
'유령'은 독보적인 이해영 감독의 독보적인 미쟝센으로 '스타일리시한 스파이 액션의 탄생'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오프닝을 장식한 난영은 중절모에 남성 스타일의 클래식한 양장차림을 했다. 의상 뿐만 아니라 강렬한 컬러로 1930년 경성 거리를 완성했고, 벼랑 끝 외딴 서양식 호텔 등으로 영상미를 뽐냈다.
"영화에 담기는 것들이 관객들에 시각적으로 충만한 경험이 되길 바랐다. 이전 영화와 다른 점은 모든 게 아름다워야 한다는 강박으로 집착했다. '유령'은 독립운동가의 목적을 그린다. 관련 자료들을 많이 보다보면 독립운동가들이 찬란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희생과 투쟁과 싸움. 이런 것들이 뜨겁게 만드는게 있다. 대의를 위한 희생이라는 메시지 이전에 감정을 잘 표현하려면 영화에 어떤 색감이나 비주얼 미쟝센 이런게 동원되야만 잘 담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는 캐릭터들의 싸움과 절실함, 투철한 어떤 것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수단으로 동원되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화 '유령' 스틸/CJ ENM |
쥰지(설경구)와 차경, 유리코(박소담), 천계장(서현우) 백호(김동희)가 갇히는 호텔은 바닷가 인근에 위치했다.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유럽 고성 스타일로 새로움을 안긴다. "제일 처음에 중요하게 생각한게 경치다. 풍광이 너무 좋아서 여가를 즐길 수 있지만 물리적으로 외진 곳이어서 감금될 수 있는 외딴 지형이었으면 했다. 호텔이 현대적이고 안락한 공간으로 보이지만, 이면에는 전형적인 일제의 민낯을 담아낼 수 있는 추악함이 공존했으면 했다. 완전히 민낯이 드러난 순간부터는 그 안락했던 공간이 어둡고 더럽고 질척대고 그런 공간으로 탈바꿈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쥐도 많이 나오는 것이다."
일제의 민낯이 담긴만큼 '유령'의 독보적인 악의 캐릭터 카이토는 호텔에서 압도적인 모습이다. 카이토로 분한 박해수는 사실 촬영 2주전에 급하게 캐스팅됐지만, 빈틈을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일본어 대사와 캐릭터 소화력으로 감탄을 자아낸다. "카이토는 일본인이었으면 했어서 일본 배우를 캐스팅했지만 올 수 없었다. 박해수씨와는 일면식도 없는 관객 입장이었다. 박해수 배우가 연기를 끝내주게 하면서 완전히 설득해낼 것 같았다. 성실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캐스팅했다. 근데 짧은 시간에 상대 배우의 일본어 대사까지 외워와서 감탄했다. 호텔 식당에서 혼자 장악하는 씬부터 촬영했다. 영화에서 가장 큰 씬인데 공사 스케줄 상 크랭크인 후 제일 먼저 찍었다. 저는 박해수씨를 처음 딱 본 순간 반했다. 제가 바라는 것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거절하려고 나왔던 박해수는 사실 하고 싶었고, 저를 만났는데 너무 잘해내고 싶은 욕망이 들끓는게 보였다. 저는 서로가 첫눈에 반했다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너무 선물같은 캐스팅이었다. 작품 할때마다 천운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번에 큰 운은 박해수 캐스팅이었던 것 같다."
카이토와 대척점을 이루는 인물 쥰지로는 설경구가 연기했다. 설경구는 기존의 작품에서 보여준 적 없는 캐릭터로 새로움을 선사했다. 이해영 감독은 "쥰지 캐릭터는 쉽게 읽히지 않았으면 했다"고 했다. "복합적인 설정이 필요했다. 결과적으로 교란시키는 인물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건네는, 큰 축을 담당하는 딜레마 설정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쥰지는 좌천됐다가 복귀하는 것이 가장 큰 숙명이다. 제복으로 갈아입고 모자를 쓰는 순간이 정말 중요했다. 한번에 딱 각을 맞춰야 한다. 근데 그게 어렵다. 그래서 제가 디테일한 요구를 했었다. 근데 선배님이 인터뷰에서 짜증났다고 하셨더라. 저의 유난 덕분에 설경구 배우는 1mm도 손상되지 않은 채 영화에 잘 담긴 것 같다(웃음)."
▲영화 '유령' 이해영 감독/CJ ENM |
그러면서 감독은 "카이토와 쥰지가 몸싸움을 할 때, 카이토가 쥰지를 넘어서기 위해 아등바등한다. 이때 발이 포인트였다. 그 장면에서 끼이 끼끼익 소리가 난다. 일부러 만들어서 넣었다. 그걸 쥐새끼처럼 보이게 만들고 싶었다"고 비화도 덧붙였다.
박소담은 '유령' 촬영 당시 건강 상태가 좋지 못했다. 물론 뒤늦게 암의 존재를 알게 돼 촬영을 마친 후에는 수술 후 치료에 전념했다. 극 중 유리코로 분한 박소담은 이하늬와 함께 여성 캐릭터 서사의 한 축을 담당하며 다채로운 액션 연기를 펼쳤다. 그의 총격 액션씬은 '유령'의 명장면 중 하나로 손 꼽힌다. "총격씬은 제일 난이도가 높았다. 유리코는 총도 쏘고, 그 장소에서 사람한테 불이 붙기도 한다. 정말 어려운 촬영이었는데 찍다보니 분량 소화가 안되서 고생 많이 했다. 마지막 회차에 찍은 것이다. 원래는 육탄전을 계획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화염병 아이디어가 나온 것이다. 회의 끝에 원래는 없었던 화염병씬을 촬영했다. 당시 아팠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그래서 더 미안하고 짠한 느낌이 있다. 그때 액션도 정말 많이 시켰었다. 소담 배우가 힘들다는 말을 잘 안하는 성격인데 걱정을 많이 했었다. 그때 정말 열심히 구르고 뛰고 했었다. 정말 잘해줬다."
이해영 감독의 모든 작품은 '유령' 뿐만 아니라, 캐릭터 무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모든 캐릭터가 살아 숨 쉰다. 박차경을 이하늬를 떠올리며 만든 것처럼, 캐릭터를 구축할 때부터 배우와의 캐릭터의 시너지를 생각한다. 이는 이해영 감독이 추구하는 목표이기도 하다. "그동안 매번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해왔지만 돌이켜보면 어느 하나의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좋아하는 것을 따라가다 보니 총집합 같은 느낌이 있다. 다음 작품은 장르적으로 다른 이야기가 될 것 같다. 그럼에도 불변이 있다면, 저는 매번 시나리오를 쓸 때 캐릭터에 배우를 응용해 가장 매력적이고 빛나게, 연기력으로 소화하게 끔 하는 게 제 목표다. 배우가 빛나는 게 영화가 빛나는 것 같다. 잘 담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 같다. '저 배우가 저런 것도 하는구나', '새롭다' '저런 얼굴이 있었네?' 이런 반응이 가장 큰 보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