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W 노이슬 기자]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하 '중꺾마'). 2022년 말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쓰는 유행어다. 프로게이머 김혁규 선수가 리그 오브 레전드 2022 월드 챔피언십에 참가한 후 인터뷰에서 한 말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밈이다. 열정만 있으면 언젠가는 이뤄낼 수 있다는 2002년 '꿈은 이뤄진다'는 슬로건과 같은 결의 의미로, 힘든 시기를 보내면서 나 스스로에게, 상대에게 힘을 불어넣을 수 있는 말이다.
배우 진선규는 '중꺾마'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데뷔 20년만에 스크린에서 원톱영화를 선보였다. 첫 주연작이 무려 자신의 고향 진해가 배경이었다. 개봉을 앞두고 진선규는 "금의환향"이라는 표현으로 떨리는 마음을 전했다.
▲영화 '카운트' 박시헌 役 진선규/CJ ENM |
진선규가 원톱 주연을 맡은 '카운트'(감독 권혁재)는 금메달리스트 출신, 한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 마이웨이 선생 ‘시헌’(진선규)이 오합지졸 핵아싸 제자들을 만나 세상을 향해 유쾌한 한 방을 날리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지난 22일 개봉, 첫날 3만 8천여명을 동원하며 일일 박스오피스 한국영화 부문 1위를 차지하며 흥행 청신호를 알렸다. 누적 관객수는 5만 2천명이다.
데뷔 20주년에 첫 원톱 주연작을 내놓은 진선규는 언론 시사회 장에서부터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개봉을 앞두고 만난 진선규는 간담회장에서 눈물을 보인 것과 관련해 "부담이 안됐다면 거짓말이다. 그 날 아침에 시헌 선생님과 동료 배우들에게 떨린다는 말을 했었다. 근데 선생님(쌤)께서 '대한민국 최고 배우 진선규가 링 위에 올라가는데 떨리면 어떡하냐'면서 응원해주셨다. 그 응원이 힘이 됐다. 저는 리더같은 깜냥은 없는 사람이라 익숙치 않은데 많은 분들이 응원해주셔서 감사한 마음에 울컥했다"고 했다.
'카운트'는 유쾌한 성장 힐링극이지만, 88 서울 올림픽 복싱 금메달리스트 박시헌 선수의 일화를 모티브로 새로운 설정을 추가했다. 당시 박시헌 선수는 복싱 라이트미들급 결승전에서 스스로도 예상치 못한 판정승을 거뒀다. 이로 인해 편파판정 논란 속 선수 생활 은퇴 선언, 이후 모교인 경남 진해중앙고 체육 교사로 부임해 복싱팀을 창단, 제자들을 키우는 데 열정을 쏟았다. 2001년 국가대표팀 코치를 시작으로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복싱 국가대표 총감독을 역임하며 진짜 금메달을 향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진선규는 88 서울 올림픽에 대해서는 '굴렁쇠 소년'만 기억했다. 제안을 받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던 사실이다.
▲영화 '카운트' 박시헌 役 진선규 스틸/CJ ENM |
"이 작품 받고 나서 진해에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시나리오를 받고 이런 이야기, 이런 사람, 이런 대단한 동료의 가족의 꿈을 이뤄가는 분이 계셨다는 부분에 많이 공감하면서 읽었다. 제가 추구하는 방향과 너무 비슷한 인물이었다. 그게 시헌이 아니라 진선규라고 해도 되게 어울릴 것 같을 정도로 제가 좋아했다. '범죄도시'로 이슈가 되서 잘 되고 그 짧은 순간에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정말 하고 싶다'고 리콜했었다."
실화는 묵직하지만 완성된 영화는 유쾌한 감동 서사로 힐링을 안긴다. 하지만 당사자와 실제 가족, 주변인 인장에서는 평생의 지울 수 없는 아픔이다. 영화 제의를 한 후에도 오랜시간 설득 과정을 거쳤다. 진선규는 외적으로 다가가기보다 내적으로 접근했다. 박시헌에 자신을 투영하다보니 관객들에 누구보다 '중꺾마'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쌤께서는 오래 전부터 안 했으면 좋겠다고 하셨었다. 이 이야기가 어떻게 보여질지, 두려움이 있으셨다. 좋은 것이 아니다. 아픈 이야기니까. 시나리오에 있는 내용 그대로 똑같이 얘기해주시더라. 제 대사에도 나오지만 자신이 은메달이었으면 사랑하는 복싱을 가지고 행복하게 꿈꾸고 살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가지고 계셨다. 선수들은 자신이 경기하고 나면 안다고 하더라. 그때 '왜 내 손을 들지?'라고 느끼셨다더라. 그 순간에 기뻐는 해야는데 아닌 것 같았다고 마음이 교차했다고 하시더라. 선생님의 그 한 마디가, 마음이 전달되는 느낌이었다. 시나리오 그대로 올림픽에서 '진짜 금메달'을 손에 쥐고 싶어하셨고, 그걸 위해서 아직까지 노력하는 모습이 인간 진선규에 와 닿았다. 외형적인 것은 100% 다른데, 내적인 모습이 90% 정도로 닮았다고 생각했다. 힘을 얻는 부분, 원동력을 발산하는 끈기, 성실함 같은 부분들. 무엇보다 후배들과 같이 꿈을 이뤄내는 모습들이 너무 비슷했다. 제가 주연한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으면 좋지만, 그렇지 않아도 어느 순간 또 기회는 온다고 생각한다. 계속 인생의 실패는 아니니까. 외형적인 묘사보다는 그때 들었던 마음가짐, 어떤 생각으로 이겨내고, 무너졌을 때 어떤 것들이 다시 일으켜 세웠는지, 그런 것들을 진심으로 담겼으면 했다."
▲영화 '카운트' 박시헌 役 진선규/CJ ENM |
진선규는 외적인 싱크로율에 대해서는 자신없어 했지만, 관객의 입장에서 프로는 아니더라도 '아마추어급' 복싱 선수가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진선규의 자세는 '선수' 그 자체다. 극의 배경인 진해부터 복싱, 체육 선생님이라는 소재까지도 진선규와 맞닿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복싱 좋아하는 나, 체육쌤이 되고 싶은 나, 진해가 고향인 나, 가족을 위해 살아가는 시헌. 후배들과 행복해면서 꿈을 이뤄가는 모습이 너무 닮아있었다. 닮은거지만 그걸 이용해서 캐릭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저는 복싱을 36살 때 시작했다. 열심히 하니까 프로 테스트 제의도 받았다. 공연을 하던 시기였고, 그때는 부르면 어디든 달려가던 시기였기에 테스트는 못 받았다. 이번에 촬영하면서 끝날 때까지 6달동안 합을 맞추고 훈련했다. 그리고 저는 체육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예전부터 복싱을 하고 싶어했다. 실제 저희 아버지가 중학교때까지 아마추어 복싱 선수였다. 당시만 해도 복싱 선수를 하면 나쁜 쪽으로 빠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저한테 언급도 안하셨다. 그래서 동네 체육관에서 시작했다."
훈련하면서 박시헌 선수가 미트도 받아줬다며 미소지었다. "쌤과 훈련을 하는데 미트를 받아주셨다. 금메달리스트도 국대 감독님한테 미트를 받는데, 쨉, 탁! 받고 원투! 받더니 제대로 하셨다고 칭찬해주셨다. 그래서 정말 더 의욕을 갖고 하다가 힘빠져 죽는 줄 알았다(웃음)."
극 후반부 링 위에 오른 제자 윤우(성유빈)와 마치 한 몸이 된 듯한 움직임은 인상적이다. 윤우가 링 위에서 경기를 펼친다면, 시헌은 경기장 밖에서 이를 바라보며 쉐도우 복싱을 선보인다. "교차편집이라서 그렇지, 그것만 링 위에서 엄청 찍었다. 복싱의 기본 자세 훈련은 두 달 반을 연습했다. 윤우 같은 경우는 링 위에서 계속 싸우는 연습을 해야했다. 그 부분들은 윤우와 계속 연습했었다. 꽤 오랜시간 쉐도우 복싱 장면을 찍었다."
▲영화 '카운트' 박시헌 役 진선규/CJ ENM |
작품의 1주연으로서 가장 많은 분량을 소화하고, 극을 이끌어야 했던 촬영장은 어땠을까. 진선규는 스스로 리더십이나 추진력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하고 싶었던 것은 단역들과 리딩하는 일이었다. 누구보다 단역배우의 마음을 잘 알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카운트' 현장에서 실제 원하는 바를 이뤘다.
"제가 주인공을 하게 되면 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단역 배우들과 리딩을 하고 기회가 되면 식사를 하는 일이다. 제가 단역이었을 때, 연극 무대에서 주인공할 때도 그랬지만 작은 역할의 친구들한테 '나는 주연이라서 어떻게든 나를 본다. 너희들이 잘 해야한다'고 했었다. 그래서 그 친구들에 잘 맞춰준 순간이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대사를 하면 어색하다. 끝나고 올때는 아쉬운 마음에 그 한마디를 몇 시간동안 읊는 경우도 있다. 내가 영화를 찍을 때 주인공이 되면 단역과 리딩을 가지고 한분한분과 인사를 하고 식사를 할 수 있었으면 했다. 영화 속 저는 부족한게 많아 보였다. 그 외의 많은 분들, 적은 분량의 분들은 너무 좋더라. 극 중 감깐 등장하는 교장실의 학부모분들도 한분 한분 만나서 이야기하면 감사하다고 했었다. 연기를 잘하시는 분들이 잘 할 수 있게 끔 하는 것이다. 빈틈이 없더라. 영화는 전체 협업으로 이뤄지는 작업이다. 제 부족한 부분을 그분들이 채워주는 느낌이라 저는 좋았다. 따듯하고 해보고 싶었던 것을을 한 순간이었다. 드라마는 변수가 많다. 그 이후에도 촬영 전에 대본리딩을 함께 하려는 습관이 생겼다. 이 생각은 '범죄도시' 때 계상이가 저를 이해해주고 증명해줬고, 느꼈었다. 그래서 저도 꼭 그걸 해야지 생각했었다."
극 중 시헌이 세간으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힘든 시기를 버텨낼 수 있게 한 원동력은 가족과 주변의 지인들이었다. 시헌의 아내가 되는 일선 역시 실존 인물이다. 진선규는 "시헌 쌤이 완성된 영화를 보시고는 '나의 30년, 모든 아픔을 이렇게 잘 풀어내주고 씻겨줘서 고맙다'고 하셨었다. 근데 아내분은 너무 아파서 못 보시겠다고 하더라. 시사회 때는 혼자 오셨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시헌 쌤이 프러포즈도 안 했고, 하와이도 안 가고, 결혼식도 올리지 않으셨다. 상대가 미국 선수였으니까. 이민 가자고 한 것도 사실이다. 한국 사람들한테 인정받기 힘들었으니까. 무너질대로 무너진 상황이었다. 시사회에 쌤이랑 가족분들이 오셨는데 아내분은 안 계셨다. 너무 아파서 못 보시겠다고 하더라. 제가 그 말을 듣고 울컥했다. 영화를 아무리 좋게 찍었어도 아픈 것을 못보겠다고 하시는 마음이 이해가 갔다. 10년동안 시나리오화 되고, 영화가 되기까지도 안 나왔으면 좋겠다고 하셨었다. 다시 손가락질을 받을까봐...그래서 아직은 사모님은 못보겠다고 하셨다고 하더라."
▲영화 '카운트' 스틸(맨 오른쪽 초록색 티셔츠 입은 배우가 최형태)/CJ ENM |
아내 일선과 고등학교 은사이자 진해중앙고등학교 교장으로는 오나라, 고창석이 함께 했다. 첫 주연작을 연극 배우 시절부터 오랜 인연을 맺은 두 사람과 함께 했기에 든든했다. "그 힘든 시기를 같이 겪은 동료다. 두 사람이 현장에 오면 제가 기댔던 기억이 있다. 예전에 저랑 같이 꿈꾸고 '선규가 진짜 잘하는 애야. 나중에 멋지게 만나자'고 했던 누나다. 창석 형도 항상 같이 고민하는, 늘 술친구 같은 형이었다. 그런 두 사람을 내가 주인공인 무대, 현장에 있으니까 저한테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투샷 촬영 때 '잘 하고 있다'고 응원해주면 다시 또 힘을 내고 그랬다."
진해중앙고 복싱부로 호흡한 배우들도 대부분 신예다. 윤우 역의 성유빈, 환주 역의 장동주, 라이벌 진영이었지만 동수 역의 이홍내 등 대부분이 20대 또래 배우들이었다. "그 친구들과 두 달 반 정도 함께했다. 처음에는 MZ세대, 젊은 친구들에 맞춰야할지 고민했다. 크랭크인 전에 운동을 하다보니 금방 친해졌다. 3인방 친구들 중에 형태라는 코 큰 친구가 있다. 그 친구가 39살이라고 하더라. 나랑 4살 정도밖에 차이가 안나더라. 개봉 할 때는 40대가 됐다. 서른 아홉에 고딩을 연기하는데 진짜 고등학생처럼 보였다. 다들 20대이기도 해서 훈련 끝나고 맥주 한 잔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진선규에게 '카운트'는 원톱 주연 그 이상의 의미다. 개봉 여부 조차도 알 수 없었지만, 다행이 데뷔 20주년에 개봉하게 됐다. '카운트' 관련 행사를 하면서도 진행자의 바로 옆 자리에 서는 것부터 진선규에는 설레는 일이고 색다른 첫 경험이었다. "제가 태어난 곳의 이야기를 적은 분량의 역할이 아닌 주인공으로 한다는 것 자체가 예전으로 따지면, 감투를 쓰고 말을 타고 도포를 입고 금의환향하는 느낌이다. 배우 인생에 있어서 서사를 이끌어가는 큰 인물, 포스터에 내 얼굴이 대문짝만 하게 나온 것이 처음 겪는 과정이라 뜻깊고 부담도 되고 어깨가 무겁기도 하지만 기회가 되서 또 주연을 하게 된다면 지금보다는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다. '범죄도시'가 제 인생에 스타트를 , 다른 곳으로 옮겨놓은 것이라면 그 성장에 있어서 '카운트'가 좋은 스타트가 되는 것 같다."
이제는 그 어떤 배우보다 '믿고 보는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악역으로 대중에 눈도장을 찍었지만 실제 세상 무해하고 착한 성품답게 하고 싶은 작품도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어했다. "'태일이'에서는 아버지 목소리를 연기했었다. 거기선 아버지였지만, 사회의 불공평한 것에 반하는, 그것을 이뤄내서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역할을 해보고 싶다. 정의로운 캐릭터. 물론 멜로도 해보고 싶다(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