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첫 번째 주인공은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파이터로서 현재 세계 최대의 종합 격투기 단체인 미국 UFC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김지연.
김지연은 내년 1월 28일(한국시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의 스펙트럼 센터에서 열릴 예정인 'UFC 온 폭스 27' 대회에서 저스틴 키시(러시아/미국)와 플라이급(-57㎏) 매치를 치를 예정이다.
이번 경기는 김지연이 UFC 무대에서 치르는 두 번째 경기로, 자신의 원래 체급인 밴텀급(-61kg)에서 한 체급 내린 플라이급으로 치르는 경기라는 점에서 새로운 체급에 대한 적응과 UFC 첫 승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함께 풀어내야 하는 상황이다.
김지연(사진: 스포츠W) |
전 UFC 여성 밴텀급 챔피언 홀리 홈(미국)과의 대전을 제의 받았지만 홈의 거부로 무산됐다가 다시 다른 선수와 경기를 통해 UFC 무대 데뷔전을 치르는 과정을 거친 것.
일단 홈과의 대결을 제의 받은 것에 대해 김지연은 기분이 좋았다. 극강의 파이터로 군림하던 론다 로우지(미국)를 KO로 물리쳤던 이름값 있는 선수와 UFC 데뷔전을 치를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UFC가 자신을 홈과 경기를 치를 만한 레벨의 선수로 인정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데뷔전부터 홀리 홈과의 경기 이야기가 오갔다는 데 대해 한편으로 기분이 무척 좋았어요. 제가 그 동안 운동했던 것에 대해 UFC가 좋은 평가를 해줬다고 생각했어요. 부담도 없지 않았지만 UFC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생각이 들었죠. 홈과의 경기는 기회가 된다면 해 보고 싶어요”
김지연의 이와 같은 바람과는 달리 홈은 연말에 크리스 사이보그와 UFC 여성 페더급 타이틀전을 앞두고 있다. 플라이급으로 체급을 낮춘 김지연과의 체급 차이로 인해 이들의 대결을 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밴텀급 정도에서 오퍼를 다시 준다면 홈과의 대결을 결코 빼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지금은 플라이급으로 체급을 결정한 만큼 현재의 체급에서 적응을 잘 하고 예정된 경기를 잘하기 위해 열심히 훈련할 생각입니다.”
자연스럽게 체급을 낮춘 배경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 갔다. 밴텀급으로 주로 활약해 왔고, UFC 데뷔전도 밴텀급으로 치렀던 김지연이 플라이급으로 체급을 낮춘 배경에는 서구 선수들과의 어쩔 수 없는 신체적 차이 때문이었다.
“언젠가는 플라이급으로 뛰어야겠다는 생각은 항상 가지고 있었어요. 해외 선수들(밴텀급)이 워낙 골격이나 신장 같은 신체적 조건이 워낙 좋기 때문에 저는 제가 싸울 때 좋은 조건으로 유리하게 싸울 수 있는 체급이 플라이급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저도 처음에는 -58kg계약 체중 경기도 해봤기 때문에 항상 플라이급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UFC에는 원래 여성 플라이급이 없었다. 김지연도 플라이급 경기를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그 동안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밴텀급 경기를 준비해야 했다. 하지만 최근 플라이급이 신설됐고, 김지연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김지연의 UFC 데뷔전은 6개월 전 일이지만 아직까지도 진한 아쉬움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자료사진: SPOTV 중계화면 캡쳐 |
당시 김지연은 2라운드까지 타격으로 좋은 흐름을 이어가면서 먼저 승기를 잡았지만 3라운에서 푸딜로바의 강한 전진 압박에 고전하며 서브미션 패배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결국 그렇게 승부는 판정에서 가려지게 됐다.
“경기를 한 입장에서 주먹의 정확도라던가 그런 면에서 제가 맞은 것보다 정확하게 정타로 맞힌게 더 많다고 생각이 들어서 사실 판정으로 갔을 때 ‘내가 유리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상대 선수에게 승리가 돌아갔고 아쉬운 부분이 많았어요. 워낙 응원해 주시고 기대해 주신 분들이 많아서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더 들었기 때문에 스스로 너무 아쉬웠죠”
분명 근소한 차이였고, 김지연의 손이 올라 갔어도 이상한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김지연은 당시 경기 결과에 대해 의연했다. 과거의 경험에서 배운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아쉬운 판정들은 좀 있었어요. 특히나 복싱을 할 때…그 때마다 생각했던 게 내가 더 확실하게 또는 KO로 이겼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아니면 원 사이드하게, 애매한 것이 아니라 정확하고 확실하게 이겨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어쨌든 승리를 기대하는 순간 상대 선수의 손이 올라갔을 때 김지연의 기분은 어땠을까?
경기에 임하면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냉정한 파이터로 비쳐지는 모습이지만 사실 김지연은 무척이나 여린 성격이다. 이겨도 져도 울컥하는 감정에 휩싸이곤 한다. 푸딜로바에 패하고 옥타곤에서 내려온 순간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표정 관리를 좀 못했던 것 같아요(웃음). 그냥 빨리 옥타곤에서 내려가고 싶었고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죠.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기도 했고 해서 빨리 내려왔는데 할게 많더라고요 메디컬 체크도 해야 하고…국내나 일본에서 뛸 때보다 할 게 너무 많더라고요 그래서 더 정신이 없었던 것 같아요. 혼자서 좀 울고 싶었는데 그런 시간 조차도 잘 안 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 샤워 하면서 마음을 가다듬었어요.”
김지연이 이 순간 혼자 만의 시간을 갖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던 이유는 또 있었다.
“거기는 동양권이나 한국 사람들이 없고 서양 사람들만 있었기 때문에 제가 경기를 못했다고 울고불고 하는 모습을 누구한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샤워하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티를 안 내려고 노력했죠. 근데 아직도 너무 아쉬워요”
순간 김지연의 목소리에서 떨림이 느껴지면서 눈가는 붉어졌고, 눈에는 살짝 이슬이 맺혔다.
꿈에 그렸던 UFC 무대 데뷔전은 그렇게 기대 이하의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그래서 자신이 그려왔던 플라이급 무대에서 펼치게 된 두 번째 UFC 무대에서 승리를 거두고자 하는 마음은 더욱 더 간절하다.
UFC에서 스트로급으로 활동해 온 키시는 지난 6월 'UFC 파이트 나이트 112'에서 펠리스 헤릭에게 판정으로 져 종합격투기에서 첫 패배를 기록했다. 당시 경기 중 헤릭의 리어 네이키드 초크에서 빠져 나오다가 힘을 너무 많이 쓴 나머지 옥타곤 바닥에 설사를 지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지연은 키시를 어떤 선수로 분석하고 있는지 물었다. 그 동안 김지연은 상대 선수의 영상을 분석하는 스타일이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좀 다르게 키시와의 경기를 준비하고 있다.
“저는 원래 (상대 선수) 경기를 잘 안 보는 편인데 이번에는 그 선수의 경기를 찾아서 몇 번 집중해서 봤어요. 무에타이 챔피언 출신이라 타격이 무척 정교하고 깔끔할 줄 알았는데 사실 그렇지는 않더라고요. 차라리 타격이 깔끔하고 정교하면 선수의 그런 것들(움직임이나 타격 리듬)을 읽기가 편한데 약간 무대뽀 같은? 그런데도 힘이 굉장히 강해서 그걸로 다 제압할 수 있는 선수인 것 같았어요. 그렇게 어느 하나가 굉장히 위협적인 선수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전체적인 힘과 스테미너가 좋아서 그런 부분에서 조심하고 똑똑하게 경기 운영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김지연은 일단 키시를 상대로 펀치를 통한 승부를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그라운드 상황에 대한 대비도 철저히 할 생각이다. 지난 푸딜로바전에서 타격 승부에 집착한 나머지 푸딜로바의 레슬링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경기운영 미숙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각오다.
화제를 약간 돌려 봤다.
최근 국내 종합격투기 단체인 로드FC에서 여성부리그인 더블엑스(XX)를 출범시키는 등 국내에서 여성 격투기 분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국내 1세대 여성 종합 격투기 파이터 격인 김지연은 이와 같은 상황이 누구보다 반갑다.
“예전에는 경기를 뛰고 싶어도 대회도 없고 기회도 없었어요. 여자 선수들도 화끈할 수 있고, 잘 할 수 있는데 기회가 없어서 빛나지 못한 선수가 있었다고 생각이 들어요. 경기를 치르면 치를수록 더 성장하고 발전하기 때문에 (현재 상황은) 좋은 선수가 나올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는 것 같아서 진짜 좋아요. 그래서 틈틈이 여자 선수들 경기를 챙겨 보고 있어요”
김지연은 그러나 현재 활동 중인 국내 후배 여성 파이터들 가운데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선수가 있는 지에 대한 질문에는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 아직은 젊은 여성 파이터들이 성장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특별하게 눈 여겨 보고 있는 선수라고 말할 만한 선수를 거론하기 어렵다는 것.
이어 김지연은 자신과 함께 UFC 무대에서 뛰고 있는 후배 전찬미에 대해 애정 어린 평가를 내렸다.
“일단 어리기 때문에 발전가능성이 많지 않을까 생각해요. 경기가 없어서 여기까지 오는 데 멀리 돌아온 저와 비교할 때 어린 선수임에도 그런 기회를 얻었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라고 볼 수 있어요. 또 어린 선수답게 패기가 좋아서 크게 성장할 수 있는 선수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전찬미가 지난 두 차례 경기에서 패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경기력에 대해서는 대선배로서 따끔한 지적을 잊지 않았다.
“타격에서 힘을 쓰는 것에 비해 정확도가 부족하지 않나 생각해요. 그리고 경기 중에 소리를 지른다거나 하는 행동도 상대에게 스스로 지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한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제 상대가 그렇게 했다면 지쳐서 일부러 더 그러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했어요. 그런 감정적인 컨트롤에서 아쉬움이 있었어요”
또 플라이급 한계 체중을 맞추기 위해 경기까지 10kg 정도의 감량이 필요하기 때문에 식단을 조절하는 등 체중을 조절하면서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최근 UFC에서 여성 플라이급 챔피언이 탄생되기도 했고 그의 경기를 지켜보기도 했지만 김지연은 별다른 감흥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고 했다. 일단 자신의 경기에 집중하자는 생각 때문이다.
올해 28세로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아직 스스로의 체력과 경기력에 자신감이 있고, UFC와 계약한 4경기 이후에도 재계약을 통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겠다는 의지도 크지만 거창한 목표보다는 일단 현재 플라이급이라는 새 체급에 적응하고 한 경기 한 경기 최선을 다해 좋은 경기를 펼치는 것을 1차 목표로 설정해 놓고 있다.
인터뷰를 마치고 이어진 사진 촬영에서 내내 어색하고 쑥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 김지연은 막상 포즈와 동작, 표정을 요구하자 이내 승리에 굶주린 파이터의 눈빛을 보여줬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희귀하게 여겨지는 여성 파이터로서 화제성 이슈로 스타에 오르기 보다 파이터로서 올곧은 노력으로 정글과도 같은 세계 격투기 무대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겠다는 의지를 지닌 ‘진짜 프로’ 김지연의 진면목을 그의 눈빛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저작권자ⓒ 스포츠W(Sports W).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