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W 노이슬 기자] "이끼가 끼는 시간을 허용해야겠다 싶었다. 어떤 이끼가 얼마나 어떻게 끼는지, 그렇게 10년을 굴러보자 생각했다."
여배우가 여성팬들을 갖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배우 이하늬는 여성들의 '워너비 아이콘'으로 통한다. 우월한 기럭지부터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만큼이나 성격까지도 쿨한 이하늬는 많은 여성들에 워너비로 떠오르며 '꿀언니'로 불린다. 그런 이하늬가 카리스마까지 장착해 '여전사'로 변신, 한국 영화사의 여전사의 계보를 잇는다. 존재만으로 듬직하다.
'유령'(감독 이해영)은 1933년 경성, 조선총독부에 항일조직이 심어 놓은 스파이 '유령'으로 의심받으며 외딴 호텔에 갇힌 용의자들이 의심을 뚫고 탈출하기 위해 벌이는 사투와 진짜 '유령'의 멈출 수 없는 작전을 그리는 영화로, 지난달 18일 개봉했다.
▲영화 '유령' 박차경 役 이하늬/CJ ENM |
이하늬는 '유령'에서 박차경을 연기했다. 각본, 연출을 맡은 이해영 감독은 '박차경' 캐릭터가 영화의 시작이라고 밝히며 이하늬에 대한 신뢰감을 드러낸 바. 이하늬는 "제안 받고는 너무 감사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렇게 매력적인 캐릭터와 작품을 만나다니. 작품이 저를 선택해주는 것이 선택하는 것보다 더 큰 것 같다. 작품이 저한테 운명처럼 와주기도 한다. '유령'은 그 타이밍이 맞았던 것 같다. 제가 일을 할 수 있고, 액션이 가능한 나이대에 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럭키했다."
박차경은 총독부 통신과 암호전문 기록 담당으로 유령으로 의심 받는 인물 중 한명이다. 차경은 극 초반 등장한 동지 난영(이솜)을 잃게 된다. 이하늬는 차경을 쉽게 흔들리지 않고 바위같은 묵직함을 가진 인물이라고 말했다. "차경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나와서 독립군의 길을 걷는다. 난영 사건이 있고 난 후 집에 와서 혼자 세면대에서 몸을 떠는데, 주저 앉아서 엉엉 울지 않는다. 거울에 비치는 자신을 보는 모습이 차경답다는 생각을 했다. 차경은 쉽게 감정을 드러내기보다 깊은 동굴 안에서 혼자 견디는 인물이다. 그가 어떤 생각으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삶을 지탱하고 있는지에 대해 저도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캐릭터에 대한 궁금함이 레이어를 더 만들기도 했다."
차경은 카이토(박해수)로 인해 조선 총독부 통신과 감독관으로 좌천된 쥰지(설경구), 정무총감 비서 유리코(박소담), 암호 해독 담당 천계장(서현우), 통신과 직원 백호(김동희)와 호텔에 감금된다. 이하늬는 호텔 씬을 이끌어 간 박해수를 떠올렸다. "마스터를 넘어선 배우들이 있다. 박해수씨를 보면서 아 저런 분이었지 생각들었다. 신의 경지에 이른 분 같은 느낌이다. 카이토가 짓이기는 표정으로 머리를 넘기는 장면이 있는데 그걸 영화 보는 내내 따라했다. 너무 선한 분인데 악역을 즐기신다. 정말 엄청난 배우라고 생각했다."
▲영화 '유령' 박차경 役 이하늬 스틸/CJ ENM |
같은 방을 쓰게 되는 유리코로 분한 박소담과는 워맨스를 선보인다. 특히 '유령' 촬영 당시 박소담은 자신이 아팠던 사실을 몰랐다. 힘든 촬영을 참아내면서 명장면을 만들어냈다. 이하늬는 "소담씨는 문화재로 지정하고 싶다. 특별보호 관리해야 하는 배우"라며 극찬했다. "대한민국 영화를 위해서라도 건강했으면 한다. 정말 독보적이었다. 저런 작은 체구에서 체구가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강단있게 해내는지 대단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몸 상태였는데 그렇게 해냈다는게 더 경이롭다. 상대 배우와 끊임없이 의견을 주고 받고, 주도적으로 본인이 싫은 내색 하나 없이 몸 받쳐서 할 수 있는지 놀라웠다. 맨발로 하는 액션에도 몸을 사리지 않았다. 정말 대단하고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후배를 떠나서 정말 진짜 멋진 배우다. 문화재로 지정하고 싶은 배우였다(미소)."
'유령'은 원작을 한국 배경으로 각색하며 새로움을 더했다. 유령의 정체를 찾아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1930년대 그 누구보다 뜨거운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이름 모를 독립투사들의 활약을 담아냈다. 이에 이하늬는 맨몸 액션은 기본, 총기 액션으로 이전에 본적 없는 카리스마를 선보인다. 극 중 차경의 주 무기는 장총이었다. 무게만 해도 무려 10kg이다.
"처음에 6개월 정도 연습했다. 실제 무게라고 해서 들어보니 이걸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부터 앞섰다. 저도 힘이 약한 사람이 아닌데도, 들고 하루종일 탄창을 장전한 상태로 걸으면서 카타르시스를 해쇄야하는데 자면서도 장전 탕! 장전 탕!을 중얼거릴 정도였다. 적어도 3발은 날려야 한다고 하셨다. 처음에는 한번도 힘들었다. 근데 점점 영화가 템포가 빨라지고 속도가 붙는다. 무게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총을 들고 다녔다. 피멍도 들고 익숙하지 않아서 손도 떨렸다. 악기를 오래 했는데도, 악력부터 엄청 연습했었다."
▲영화 '유령' 박차경 役 이하늬/CJ ENM |
차경의 기세는 '여전사'라는 표현을 넘어서 대장부 같다. '여자 마동석'이라는 표현도 등장했다. 그의 기세는 단단하고 강인하다. "날씬하고 건강한 몸이 아니라, 나는 전사야 스파이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 남자랑 붙어도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운동했다. 크라브 마가(이스라엘의 호신술, 군용 격투기) 같은 것도 배웠다. 차경은 상대를 맞닥뜨렸을 때 체급을 넘어선 존재를 이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상대와 붙으면 사생결단하고 삶과 죽음을 두고 계급장을 떼고 붙는다는 느낌이었다. 마동석을 언급했던 것은 그만큼의 호랑이 같은 기세를 표현한 것이다. 단련된 삶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부분에 있어서 대역을 할 수 없었다. 단단함이 몸에서 뿜어져 나왔으면 했다. 일상을 사는 차경과 차에서 내린 후 호텔에 발을 딛을 때의 단단함을 보여드리고자 했다. 대사가 없으니까 온몸에서 나오는 기운 기세가 보여져야 했다."
이하늬는 총기 액션과 맨몸 액션이 동시에 등장하는 공예단 커튼 뒤 추격 액션씬에서는 쥰지로 분한 설경구와 몸싸움을 펼친다. 성별을 불문하고 양쪽 모두 밀리지 않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하늬는 "차경은 계속 달려드는 에너지다. 되게 진빠졌다. 3~4일 정도 찍었다. 하루종일 업어치기를 했다. 정신은 잡으면 되는데 체력적으로 몸이 헛나갈 때가 있었다. 체력의 중요성을 더 느꼈다. 근육 운동도 개인적으로 했었다. 그 장면은 연극적이기도 하다. 설경구 선배여서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선배님 덕분에 무게감이 실려서 잘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사실 차경은 부족한 것 없는 집안에서 자랐으나 독립투사가 됐다. 그가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인물이 되기까지 서사는 정확하게는 없다. 관객의 해석에 맡겼다. 이하늬는 그 어떤 인물보다 몇 겹은 쌓여있고,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차경을 연기하고 난 후 후폭풍을 겪었다. "사람이 화가 나면 화를 내야 한다고 하더라. 근데 차경은 화를 내는 인물로 아니고 감정을 표출하지 않는다. 표출하지 않으면 몸 안에 남는다고 하더라, 눌러야 되는 연기를 하면서 그게 조금 힘들었다. 강도가 타격의 파동을 잦아들게 하는데 시간이 걸렸었다."
▲영화 '유령' 박차경 役 이하늬/CJ ENM |
이하늬는 지난해 영화 '외계+인' 1부에 등장하며 스크린 관객들에게 깜짝 인사를 전했다. '유령' 전까지 그는 결혼과 임신, 출산이라는 인생에서 가장 뜻깊은 시간을 맞았다. 현재는 출산 후 육아활동도 병행 중이지만 누구보다 '유령'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그동안 인생에 많은 일이 있던 시기다. 그래서 '유령'이 너무 특별하고 소중하다. 저의 인생 한복판에 구심점이 돼 준 작품이다. '유령'이 없었다면 그 시간을 잘 보낼 수 있었을까? 생각할 정도로 인생에서 구심점이 됐다. 배우로서 모든 작품들이 다 소중하지만, 분기점이 되는 작품이 있다. '유령'이 그런 작품이다."
서울대 출신 이하늬는 지난 2006년 미스코리아 진으로 발탁, 이듬해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 출전, 최종적으로 4위를 차지하며 세계 미인대회에서 저력을 과시했다. 이하늬는 이후 연예 정보 프로그램의 MC를 보기도 했고, 드라마 '파스타'에도 조연급으로 출연, 뮤지컬 '금발이 너무해'에서도 주연으로 캐스팅되며 자연스럽게 활동 영역을 넓혀왔다. 이후 꾸준히 작품에 출연하며 필모를 쌓아왔으나 이하늬를 향한 대중의 시선은 곱지 못했다. 특히 가야금 무형문화재인 모친을 기점으로 그의 가족들에 대한 이슈에 항상 둘러쌓여 있어야 했다.
그런 이하늬가 온전히 배우로서 불리기까지는 10여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2017년 드라마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에서 장녹수를 연기하며 호평받기 시작했다. 이후 2019년 영화 '극한직업'이 총 1620만 관객을 동원, 역대 한국영화 박스오피스 2위에 올랐고, 무려 2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 '원 더 우먼'으로 안방까지 섭렵했다. 특히 '원 더 우먼'은 원톱 주연작이자, 일명 황금시간대로 불리는 금토드라마였다. 이하늬는 지난 10여년의 시간을 되돌아봤다.
▲영화 '유령' 박차경 役 이하늬/CJ ENM |
"이전에는 답답한 부분이 많았다. 저로 온전히 있기를 바라는데 그렇지 못한 답답함이 있었다. 받아들인 부분도 있다. 누군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다 어쩔 수는 없다. 돌이 구르는 시간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미스코리아로 포문을 열었고, 그걸 넘지 못했다. 그래서 온전히 배우로 인지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이끼가 낄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을 줘야겠다. 외부적인 말보다 작품을 계속하겠다'고 했는데 결국 졌다. '열심히 하다보면 배우로서 성장할 수 있는 힘이 생길 것이다. 활동하면 배우로 봐주겠지. 슬픔에 갇히지 말고 열심히 배우를 하자' 결정했다. 이끼가 끼는 시간을 허용해야겠다 싶었다. 어떤 이끼가 얼마나 어떻게 끼는지, 그렇게 10년을 굴러보자 생각했다. 정말 10년 정도 걸린 것 같다. 배우 이하늬로서 되기까지 그 정도 걸린 것 같다."
10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하지만 이하늬는 항상 긍정적인 마인드로 임했다. 실제 이하늬는 모든 촬영장에서 해피 바이러스를 선사하기로도 유명하다. "몸이 튼튼하다고 해서 그럴 수 있지 않은 것 같다. 저는 영성(영적인 성품)이라고 생각한다. 항상 매일 아침 묵상하는 시간을 갖는다. 성경을 읽고 쓰던지, 혼자 기도를 한다던지, 그 시간은 저에게는 '완전무장'을 하는 느낌이다. 무장을 하고 나가면 선택하고서 산다. 그렇게 하면 네거티브한 감정보다 퍼지티브한 감정을 선택할 때가 많더라. 못한다고 하면 한도 끝도 없다. 사실 저에게 현장은 너무 감사한 곳이다. 그래서 감정을 선택하고 그 감정을 유지하는게 중요한 것 같다."
4~5년 전에는 모든 발란스가 무너지며 걸음도 걷지 못할 정도로 무너진 적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모든 건강한 육체에는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그때는 건강한 생각을 할 수 없더라. 모든 게 다 무너졌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루하루를 감사하게 살아가는 것 뿐이다. 영혼을 보호하려고 많이 노력한다."
▲영화 '유령' 박차경 役 이하늬/CJ ENM |
이하늬는 '임신'을 인생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완성도 있는 일이라고 했다. "제가 4살 때부터 국악을 해왔다. 국악은 순수예술이다. 근데 완성도 있을 수는 없는 것 같다. 임신, 출산처럼 완성도 높은 일은 없는 것 같다. 완전히 신의 영역인 교집합이다. 저는 37시간을 진통했다. 몸에 그 잔상이 아직도 남아있다. 끝까지 자연분만을 외쳤다. 몸으로 그 고통을 고스란히 맛보니 이게 삶이구나 느꼈다. 모든 어머니가 겪는 삶이고, 내가 해내야 하는 삶이다. 내가 특별하다는 생각도 안했다."
향후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에도 출산의 경험은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여유있고 편안해질 것 같다. 예전에는 생각이 많았는데 이제는 조금 더 편안하게, 확장되게 멈추지 않고 배우 생활을 할 생각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삶을 연기에 녹이고 싶은 생각도 있다. 빨리 현장에 나가서 작품 해보고 싶다. '유령'을 2021년에 찍었다. 쉬다가 촬영장에 갔을 때 어떻게 연기하게 될지 저의 태도가 어떨지 너무 궁금하다(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