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W 노이슬 기자] "고막고어자시(孤莫孤於自恃). 스스로 자만하는 것보다 더한 외톨이는 없다."
배우로서 한 역할을 10년 이상 할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특히 뮤지컬의 경우 매회 캐스팅을 위해 오디션을 진행한다. 실력은 기본, 관객들의 신뢰도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하물며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존경하는 위인으로 손꼽히는 안중근을 연기한다는 것은 무한한 신뢰가 바탕이 될 수밖에 없다. 배우 정성화는 뮤지컬 '영웅' 초연부터 2022년까지 14년동안 연기해왔다. 자신만의 신념을 갖고 무대에 오르던 그가 대한민국 최초의 '쌍천만 감독'인 윤제균 손을 잡고 스크린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14년의 안중근 연기' 내공을 카메라 앞에서 쏟아냈다.▲뮤지컬 영화 '영웅' 안중근 役 정성화/CJ ENM |
정성화가 출연한 '영웅'(감독 윤제균)은 1909년 10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일본 법정의 사형 판결을 받고 순국한 안중근 의사가 거사를 준비하던 때부터 죽음을 맞이하던 순간까지, 잊을 수 없는 마지막 1년을 그린 영화다. 개봉 8일째 100만 관객을 돌파, 개봉 후 12일 연속 한국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2일까지 총 167만 관객을 돌파했다.
동명의 뮤지컬 '영웅'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버전은 14년째 안중근 역을 연기한 정성화 오리지널 캐스팅으로 많은 화제를 모았다. 개봉 후 "정성화 덕분에 티켓값이 아깝지 않다"는 반응이 이어지며 원작 팬들까지도 사로잡고 있다.
▲뮤지컬 영화 '영웅' 안중근 役 정성화/CJ ENM |
무려 14년동안 안중근을 연기해왔지만 무대와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것은 다르다. 영화 '영웅'은 한정적인 공간에서 현장감이 느껴지는 확장된 장소로 넓혀졌다. 뮤지컬보다 역동성이 짙고, 생동감이 더욱 짙어졌다. 정성화는 노래 대사화에 가장 신경을 많이 썼다. "뮤지컬 영화하면 기본적으로 품고 있는 선입견이 있다. 갑자기 노래가 나오고, 지나던 사람이 춤추기 시작한다. 대사를 하는 와중에 갑자기 노래를 시작한다는 선입견을 깨야 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숙제였다. 그 부담감은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주는 작업이 가장 큰 목표였다."
노래를 부르는 방식도 달랐다. '영웅'은 동시녹음을 진행하며 주변의 소음 차단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노래를 부르는 입장에서는 노래 부를 때 다양한 동작은 물론, 표정 하나하나까지도 신경을 써야했다. "무대에서는 노래할 때 '장부가' 하면 오케스트라 들어오고 정제된 음악이 들어와서 동화되서 할 수 있다. 영화는 생소리로 해야한다. 백그라운드 뮤직이 인이어로 들어와서 박자 맞추기도 힘들다. 거기에 화면이 크다. 무대에서 노래하면 눈도 커지고 한다. 그걸 영화에서 그렇게 했다가는 '이게 뭐하는 짓이지' 라는 반응일거 같았다. 뮤지컬 영화의 노래를 대사처럼 할 수 있냐가 관건이었다. 이물감을 느끼지 않아야 한다. 대사를 치는 방법과 동일하게 노래해야한다는 것이다. 감정이 지나치고 모자라지도 않아야 할 것 같았다. 영화는 카메라 앞에서 거짓말 하면 들킨다."
윤제균 감독은 앞서 스포츠W와의 인터뷰에서 정성화가 '장부가'만 30번 이상 불렀다며 그의 노고를 전했다. 정성화는 뮤지컬 무대에 이어 여러 차례 넘버를 부르며 자신만의 노하우가 생겼다. "'누가 죄인인가'를 부른다 치면 강세를 주는 편이다. 각 단어에 주의를 하면 들린다. 또 7~8번 테이크를 가다보니 그 넘버가 주는 디테일이 굉장히 깊어졌다. 옛날에 감정으로 쪼갤 때, 7~8개로 쪼갰다면, 지금은 13개로 쪼개는 것이다. 디테일 차이가 저 스스로도 느껴졌다."
영화 '영웅' 속 넘버는 현장에서 녹음한 것과 후시 녹음 본을 믹스한 것이다. 정성화는 "현장에서 어떤 부분은 노래가 큰 부분은 스피커로 MR을 틀기도 했다. 조용한 노래는 인이어를 통해 노래가 나왔다. 이동차도 소리 나니까 맨발로 다니셨다. 촬영 끝나면 히터를 바로 켰다"고 스태프들의 고충을 전했다.
▲뮤지컬 영화 '영웅' 안중근 役 정성화/CJ ENM |
'영웅'의 시작은 '단지동맹'이다. 끝없이 펼쳐진 설원 위에서 안중근은 뜨거운 애국심을 불태우며 18명의 동지가 왼쪽 네번째 손가락 마디를 자르며 굳은 맹세한다. "이 작품이 뮤지컬 영화라고 알려주는 씬이다, 관객들의 마음에 쏙 들어야 한다. 관객들이 생각할 때 임팩트가 세야 한다. 눈에서 빨간 피가 나올 정도로 눈물이 나왔으면 좋겠다는게 디렉션이다. 손가락을 잘랐을 때 아픔과 피가 하르는 모습 속에서 의지를 다지는 게 복잡적으로 드러났으면 했다. 같이 뮤지컬 '영웅'을 했던 배우들과 함께 했다."
정성화는 김고은(설희 역)이 기차에서 부른 '내 마음 왜 이럴까'를 최애곡으로 꼽고는 "뮤지컬 솔로는 주인공의 생각과 자신의 아이디어로 인해 노래 끝부분에는 자신의 심리가 바뀌는 것이 목표다. 단순히 노래만 해서는 안된다. 김고은씨의 넘버는 정말 마스터피스다. '장부가'도 괜찮은 것 같다. '단지동맹'까지 3곡은 추천 드린다. 뮤지컬은 멀리서 보기 때문에 노래가 주는 에너지, 배우가 가진 힘으로 표현했다면, 여기는 감정의 힘으로 표현했다. 공연에서는 막연히 크게 부른다. 영화에서는 막연히 크게 부르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인 에너지가 가장 큰 차이인 것 같다"고 원작과 영화의 차이점을 덧붙였다.
또 전쟁 씬의 경우 뮤지컬에서는 언급만 될 뿐이다. 하지만 정성화는 영화 촬영 하면서 간접경험을 했다. "영화에서는 전투가 디테일하게 나온다. 전쟁 씬은 처음이었다. 폭음 탄을 처음 경험했다. 시키면 그냥 헤헤 거리면서 했다. 시키는대로 다 했다. 너무 재밌었다. 안중근 의사가 의병 활동을 전개했을 때, 그 당시의 모습을 경험하니까. 이토를 저격해야하는 과정까지 심리적으로 도움이 많이 됐다."
▲뮤지컬 영화 '영웅' 안중근 役 정성화/CJ ENM |
정성화는 1994년 SBS 공채 3기 개그맨으로 대중에 얼굴을 알렸다. 성대모사에 능했던 그는 시트콤 등에도 출연했지만 크게 빛을 발하지 못했다. 개그맨으로서 인지도를 올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그는 1999년 드라마 '카이스트'에서 발군의 연기력으로 호평 받았다. 이를 계기로 MBC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 DJ로 별밤지기로까지 활약했다. 그런 그가 뮤지컬로 눈을 돌리며 전혀 새로운 경력을 쌓았다. 2004년 뮤지컬 '아이 러브 유'를 시작으로 '올슉업', '라디오 스타', '맨 오브 라만차' 등에 출연하며 뮤지컬계 블루칩으로 떠 올랐다.
'영웅'은 2009년 초연에서 안중근을 연기, 2010년 제16회 한국뮤지컬대상에서 정성화는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꾸준히 '영웅' 무대에 오르던 중 2014년도에는 공연 스케줄상 '영웅'을 함께 하지 못했다. 이때 뮤지컬 팬들은 정성화에 돌아오라며 복귀를 염원하기도 했다. 정성화는 그때를 회상하며 웃었다.
"저는 사실 '영웅'으로 다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때 다른 공연이랑 겹쳐서 못한 것이다. 공연이 급하게 결정됐을 때 였다. 한 번에 두 개를 못해서 그런 것이었다. 다음 시즌에는 할 예정이었다. 개그맨에서 연기자가 되고 뮤지컬을 만나면서 인생의 목표가 새로워졌다. 관객들의 의심을 지우는 작업을 하는 것, 계속해서 발전하는 것이다. 제가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에 따라 내 앞날이나 내 행보가 정해진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그 작업은 계속될 것이다."
대중을 사로잡은 '안중근 연기'. 영화 개봉과 더불어 뮤지컬 '영웅' 역시 개막했다. 14년째 꾸준히 안중근을 연기할 수 있는 그만의 신념은 무엇일까. 정성화는 '고막고어자시(孤莫孤於自恃)'라고 말했다. 이는 1910년 3월 26일 사망하기 전까지 옥중에서 휘호한 유묵을 일괄·지정한 것 중의 하나로, 대부분 당시 검찰관, 간수 등 일본인들에 써줬다.
"스스로 자만하는 것보다 더한 외톨이는 없다는 말이다. 그 말은 저에게 하는 이야기로 들린다. 한 뮤지컬을 14년동안 하면 스스로에게 변화가 올 것 같고 매번 공연 오를 때마다 더 잘하고 싶은 마음 가짐은 항상 같다. 누군가는 안중근으로 14년을 살아왔다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저는 안중근과 저를 동일시 해본 적이 없다. 공연을 했던 저를 투영해서 보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다. 작품에서의 정성화를 생각하는 것이다. 저는 다양한 재주가 있고, 안중근 연기도 친근하고 평범해 보일 수 있게 연기할 수 있다. 영화를 통해 디테일하게 작품을 하다보니 실제로 체감하는 것들이 달라졌다. 연기의 배경이 생겨서 무대 위에서 더 확신을 갖고 연기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