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적인 ‘아나운서룩’ 차림에 또박또박 차분한 어조로 정적인 두뇌 스포츠인 바둑 대국 실황을 중계하는 캐스터와 노출이 심한 화려한 비키니 차림으로 무대에 올라 다양한 포즈를 취하면서 심사위원은 물론 관중들과 함께 교감을 나누는 비키니 선수는 ‘극과 극’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대조적인 모습이지만 김여원 아나운서에게 그런 ‘두 얼굴의 삶’은 현실 그 자체다.
최근에는 김여원 아나운서의 비키니 선수 활동이 각종 매체에 크게 부각되면서 오히려 본업인 바둑 캐스터로서의 모습이 묻히는 모양새지만 바둑은 여전히 김여원의 전부다.
그래서 이번 인터뷰는 ‘바둑 캐스터 김여원’과 ‘피트니스 선수 김여원’에 대해 비교적 분명한 구분을 가지고 진행했다.
바둑 아마추어 6단인 김여원 아나운서는 7살의 나이에 부모님이 운영하는 바둑학원에서 자연스럽게 바둑에 입문해 23살이 될 때까지 한국기원의 연수생으로 프로기사의 꿈을 키우다 결국 입단의 꿈을 접고 바둑TV의 바둑중계 캐스터로 전향, 6년 가량의 시간을 바둑 중계와 함께 해왔다.
김여원 아나운서(사진: 스포츠W) |
“적성에 안 맞을 줄 알았어요. 바둑 공부를 할 때는 굉장히 말수도 없었어요. 친구들과 만날 때는 활발하고 잘 웃지만. 정신적으로 자제하고, 억압받는 그런 게 있었죠. 그래서 (바둑 캐스터가) 굉장히 안 맞을 줄 알았는데 하면 할수록 방송도 끝이 없는 것 같고, 어려운 부분도 많고, 그래도 하면서 배워가는 것들도 많아서 재미있는 것 같아요”
김여원 아나운서는 ‘유부녀’다. 연수생 시절 만난 박정상 9단을 만나 지난 2011년 결혼했다. 남편도 프로기사가 아닌 캐스터로 활약하는 아내의 모습이 더 좋게 보였다고.
“오히려 입단을 포기하고 성격이 되게 밝아졌단 말을 많이 들었어요. 남편(박정상 9단)하고 연구생 생활을 할 때 만났는데요 남편은 연구생 생활과 승부를 할 때, 안 할 때 모습을 다 봤죠. ‘(입단을) 포기하고 나서 가슴은 아프지만 네가 많이 밝아진 것 같아서 그건 좋은 것 같다’고 그러더라고요”
바둑 대국 중계는 프로야구나 축구 등 다른 스포츠 중계들과 마찬가지로 대국을 앞두고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다.
“대회에 대해서도 공부하고 대국자에 대해서도 공부하죠. 그게 만약 팀전이면 팀 선수 개개인마다 다 알아야 하고. 제가 아무래도 계속 바둑을 했던 사람이니까 기풍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있지만 최근에 많이 변화된 부분도 있어서 최근 정보들은 다시 사범님들께 여쭤보죠. 이제는 기보를 보고 ‘이 기사는 이런 기풍’이라고 감히 판단하기가 어려워요. 어쨌든 프로기사님의 기보를 보는 거라. 감히 그럴 수 없어서…(웃음) 우선 공부를 하고 사범님께 다시 여쭤봅니다.”
대국자의 성향에 따라 캐스터가 챙겨야 하는 부분도 있다.
“프로 기사님들이 컨디션 관리를 한다고. 대회 시작 전에 일찍 와서 바둑판 앞에 앉아서 ‘운기조식’을 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시간에 딱 맞춰서 오시는 분들도 있어요. 늦는 분들도 정말 간혹 있죠. 그래서 딱 맞춰서 오시는 사범님들 중계를 한다면 약간 긴장하게 되고 미리 체크하죠 사범님들 오셨는지…”
그렇다면 대국에 늦은 기사에게는 어떤 페널티가 주어질까?
“양 대국자에게 동등하게 주어지는 대국 시간에서 늦은 시간만큼 대국시간을 공제해요. 그만큼 불리해지는 것이죠. 그 귀한 시간이 줄어드는 거니까요.”
한 차례 대국에는 보통 5~6시간이 소요된다. 이처럼 대국시간이 길다 보니 캐스터 입장에서는 아무리 대국 상황이 재미 있어도 대국 내내 대국 상황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사전 준비는 그럴 때 사용할 멘트를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럴 때는 보통 대회나 기사에 대한 정보로 스토리를 풀어요. 세계대회 생방송 같은 경우에는 한 번 시작하면 5-6시간 하기 때문에 소재가 다 떨어질 때도 있죠. 그럴 때는 정말 대국 중에 ‘어떻게 이걸 풀어나가야 하나’ 고민하죠(웃음)”
“원래 바둑이라는 것 자체가 바둑판 앞에 앉으면 시야도 좁아지고 심리 상태가 다르기 때문에 관전자에게 더 잘 보이는 경향이 있어요. 캐스터를 하면서 바둑을 보고 질문하는 역할이 되니까 굉장히 마음이 편해졌어요. 예전엔 바둑판 앞에 앉아서 내가 선택해야 했지만 지금은 그런 부담이 없죠. 그래서 이런 질문, 저런 질문, 다양하게 상상하면서 질문할 수 있어서 그런 게 좋아요”
그렇게 ‘승부사’의 길을 버리고 ‘관전자’로서의 길을 택했지만 여전히 승부의 세계에 대한 일말의 미련은 남아 있어 보였다. 16년이라는 사실상 자신의 인생 전부를 걸다시피 했던 승부의 세계를 뒤로하고 불과 몇 년의 관전자 생활을 했다고 해서 그런 미련이 사라졌을 리는 만무할 터.
그래서 김여원 아나운서는 캐스터 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종종 대회에 나갔다. 사심 없이 나간 대회라지만 패배가 주는 쓰라림은 여전했다.
“아무리 지금은 바둑캐스터고 승부를 포기했다지만 대회에 나가서 지면 기분이 너무 나빠요 스트레스도 받죠. 그 순간 자체는 몰입했기 때문에. 몰입도가 예전만큼 안 나오더라도 나름대로 한계선에서 최대한 몰입을 했다가 졌기 때문에 기분이 나빠요.”
바둑 캐스터를 만난 만큼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의 이야기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세돌 9단과의 대국이 벌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기계인 알파고가 사람인 이세돌 9단을 이기리라 생각하는 전문가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상황은 정반대였다.
“그 때는 베일에 싸여있던 상태였어요. 그 전에 공개된 기보를 참고했을 때 실력이 이세돌 사범을 이길 수 없는 실력이었어요. 공개된 기보만 봤을 때 말이죠. 그런데 그 사이에 그 정도로 발전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막상 접한 알파고의 면모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알파고가 한 판도 이기지 못하리라’던 예상은 대국이 이어지면서 ‘이세돌 9단이 1승이라도 거둘 수 있을까’ 하는 절망 섞인 회의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승패를 떠나서 그 수들 자체가 너무 놀라웠어요. 발상 자체가... 이론상으로는 나올 수 없는 수였죠. 바둑도 영감을 떠올리게 하는 분야인데 이론적으로 계속 고정관념이 박혀있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잘못된 점이죠. 그런 면을 알파고가 깨줬다고 볼 수 있어요. 처음 보는 수였기 때문에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보고 연구하니까 이건 그 이상 수준의 깊이 있는 수였어요”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 중계 당시 김여원 아나운서(사진: 방송화면 캡쳐) |
“알파고 등장 이후로 트렌드는 변했어요. 기사들이 많은 부분을 배웠죠. 바둑이 정석화 되어있는 모양이 있기 때문에 기보를 보면 어느 정도 (수가 이어진) 순서를 유추해볼 수 있는데요. 알파고 등장 이후로는 그런 알파고의 수법들이 정석화 된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어요.”
알파고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는 와중에 김여원 아나운서는 알파고를 상대했던 이세돌 9단이 참으로 외로워 보였다고 했다.
“벽을 보고 두는 느낌이었어요. 어쨌든 사람이 같이 나란히 앉아 있어야 손짓, 숨소리, 대국장에서 느낄 수 있는 그 긴장이 있는데 이런 것만으로도 어떤 기운을 잡아내죠. 상대방이 어딜 보고 있는지, 날 쳐다봤는지 이런 게 다 느껴져요. 그런 걸로도 기세를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아무 것도 없으면 어둠 속에서 두는 느낌이에요. 알파고 중계를 할 때 (이세돌 9단이) ‘진짜 외롭겠구나’ 이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을 것 같았죠. ‘너무 외롭겠다. 정말 외롭겠다’고 생각했어요”
김여원 아나운서는 스스로 바둑이 인생의 전부라고 했다. 바둑에 입문하게 된 계기도 바둑학원을 운영한 부모님 때문이었고, 지인들도 거의 바둑과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인생의 반려자 역시 연수생 시절 만난 프로기사다.
이처럼 바둑이 인생의 전부였던 ‘바둑인’ 김여원 아나운서에게 피트니스 선수로서의 삶은 그의 인생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줬다. (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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